2015. 5. 28. 15:53ㆍ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이건범 | 작가·한글문화연대 대표 ,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
먹는 거 보여주는 방송을 줄여서 ‘먹방’이라고들 부른다. 청소년들이 줄임말을 많이 쓰는 바람에 소통이 어렵다고 걱정하는 어른이 많지만, 말 줄임은 비단 아이들 세계에서만 나타나는 일이 아니다.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지 모르지만 재미있는 새말이다. 맛있는 거 먹자고 우르르 몰려가서 먹는 걸 ‘먹방 찍는다’고도 하는데, 유명하다는 맛집 찾아가 먹방 찍는 게 요즘 풍속도 가운데 하나다.
얼마 전 홍대 근처 어느 음식점 앞에서 한 시간 넘게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기어이 그 음식을 먹은 적이 있다. 먹방에서 소개한 맛집이었다. 이미 두 번이나 줄을 설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터라 오기가 발동했고, 그만큼 기대는 컸다. 하지만 꽝이었다. 나처럼 사는 게 피곤해 집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귀찮아 먹방 정보에 팔랑귀를 열고 몰려드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왜 이렇게 줄을 서 있나 궁금하고 신기했다. ‘빨리빨리’ 문화를 넘어서는 먹방 문화라고나 할까?
텔레비전을 틀면 여기저기에 놀랄 만치 먹방이 많이 나온다. 전통적인 맛 기행이나 음식 만드는 요리 방송이야 예전에도 있었으니 그다지 이상할 게 없지만, 그 수가 부쩍 늘었다. 여기에 기획력을 더 얹어 연예인 집에 있는 냉장고를 가져다가 그 안에 있는 재료만으로 요리 경연을 벌인다든가, 남자 연예인들만 출연하여 음식을 만든다든가, 무인도에 가서 재료를 구해 남자들끼리 음식을 만든다든가 하는 식으로 시청자의 눈길을 끈다.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연예인들의 음식 솜씨가 화제로 떠오른다.
최근 1~2년 사이에 부쩍 늘어난 먹방은 유선방송이 활발해진 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거다. 물론 다른 방송에서 만든다고 무턱대고 따라하는 것 같지는 않다. 시청률이 어느 정도 보장되어 그럴 거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홀로 사는 가구가 늘어난 사정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음식을 해 먹으려고 재료 사다 놓으면 손도 못 대고 버리는 경우가 많으니 외식이 더 싸게 먹힌다. 기왕 사 먹을 거라면 맛있는 거. 이런 수요가 먹방을 키운다.
전통적으로 아내의 손맛에만 의지하던 남편들이 아내에게 점수를 따고자 주말에 집 밖에서 밥을 먹으려는 사정도 작용한다. 맞벌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집안일이 얼마나 피곤한지 이제는 한국 남편들도 인정하는 터라 굳이 아내를 괴롭히려 들지 않는다. 먹방 덕에 음식에 대한 식견이 넓어지면서 집에서 만들기 어려운 음식을 맛보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도 ‘몸에 좋은 것보다는 입에 단 음식’이 지론인지라, 이런 현상을 탓할 마음은 없다. 다른 집은 파리를 날리는 한이 있어도 먹방 덕에 손님이 길게 줄을 서는 음식점은 즐거운 비명을 지를 테니, 자영업자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요식업 전체에 돈이 흘러다녀 그나마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겠는가?
그런데 해도 좀 너무한다. 세상이 온통 먹방투성이다. 골치 아픈 논쟁을 피해 올리기 쉬운 글이 먹는 이야기고 찍기 쉬운 사진이 요리 사진인지라 온라인 세상에서도 사람들의 먹방 중계가 그득하다. 심지어 군대나 정글에서 견뎌내는 생활을 보여주는 방송에서도 먹방이 진행된다. 부대 취사장을 무대로 펼치는 먹방, 원시의 밀림에서 생존하기 위해 펼치는 먹방 따위. <대장금>처럼 극의 일부 소재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저 먹기 위해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먹방 드라마까지 나온다. 선거의 계절이 다가오니 정치인들도 먹방을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
다 먹자고 하는 짓이니 혀를 찰 일만은 아니다. 그런데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이 허기, 한두 시간을 참아가며 줄을 서는 이 허기의 정체는 무얼까? 그렇게 먹어대고 또 어딘가에 줄을 서야 하는 배고픔이여. 우리 삶의 허기는 어떻게 채워야 하는가? 먹는 거 말고 즐거운 일이 없는 사회다. 그게 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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