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7. 13:24ㆍ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문화와 삶]달맞이길의 세계화, 문탠로드
부산 해운대에서 청사포에 이르는 아름다운 산길이 있다. 바다와 숲이 어우러진 이 길에 달이 뜨면 그 운치가 더하다 하여 사람들은 달맞이길이라 이름 붙였다. 난 그 소문을 듣고 몇 번 가보려 했으나 기회를 잡지 못하다 마침내 작년 봄에 이 길을 걷게 되었다. 그 입구에서 난 부산의 세계화 수준을 보고 감탄했다. 문탠로드! 한글로 크게 적은 그 이름에서 물씬 느껴지는 국어 사랑의 정신까지. 아마도 햇볕에 태운다는 ‘선탠’에서 따온 말이리라. 달빛에 뭘 태우는지는 몰라도. 부산의 세계화 수준은 영어로 이름 지은 센텀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긍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문탠로드의 비애는 이제 부산만의 일이 아니다. 2006년 제정된 도로명주소법에 따라 2014년부터 전면 시행되는 새 주소는 길 이름으로 주소를 짰고, 그에 따라 새로이 길 이름이 붙여졌다. 그 가운데 문탠로드 뺨치는 길 이름이 많이 나온다. 부산은 APEC로(해운대구), 테크센터로(강서구), 명지오션시티1로(강서), 아시아드대로(동래구), 인천은 로봇랜드로(서구), 테크노파크로(연수구), 크리스탈로(서구), 컨벤시아대로(연수), 대구는 테크노중앙대로(달성군), 광주는 앰코로(광산구), 울산은 모듈화산업로(북구), 경기는 엘지로(평택, 파주) 엘씨디로(파주), 엘에스로(안양, 군포), 에버랜드로(용인), 에듀타운로(수원), 메타폴리스로(화성), 강원도는 오크밸리1길(원주), 테마타운길(삼척), 로아노크로(원주), 오투로(태백 O2리조트), 경남은 스포츠로(남해), 에코파크길(남해), 에나로(진주), 경북은 테라피로(영주), 웰빙타운길(문경), 전남은 웰빙길(진도), 에프원로(영암), 충북은 에넥스로(영동), 충남은 아산밸리로(아산) 등이 눈에 들어온다.
땅이름을 연구해 온 박호석 전 농협대 교수 등 63명은 6월2일 도로명주소법이 헌법 제69조에 명시된 대통령의 ‘민족문화 창달’ 의무에 대한 위반이자 헌법 제9조에 명시된 국가의 전통문화 보존 의무에도 명백히 반하며, 헌법 제10조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에서 파생되는 문화향유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하여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헌법재판소가 있는 종로구 재동은 수양대군이 피를 뿌린 뒤 그 피가 흘러넘쳐 거기에 재를 뿌렸다는 일화에서 지어진 이름이지만 새 주소법에서는 이 이름이 없다고 기자회견에서 박 전 교수는 밝혔다. 그렇게 사라지는 이름이 4000개 이상에 이른다고 한다.
물론 토박이말로 새로 지은 이름들도 있다. 힘찬길, 흰여울길, 흰바위로, 황새로골길, 해돋이로, 하늘길, 큰고개길, 칼바위길, 칡머리길, 첫마을길, 지게골길, 앞등길, 쑥고개옛길, 숲쟁이길, 솔바위길, 섶나루길, 샘물단지길, 보듬로, 별빛로, 꽃다리길, 곰달래로 등. 하지만 이런 수고가 영어 이름 탓에 빛이 바랬다.
무슨 이름을 지을 때는 유행에 흔들려서는 안된다. 엘시디는 이제 엘이디로 교체되고 있는 마당에, 게다가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회사 이름까지 따서 붙인 땅이름이 과연 그 지역의 정서와 문화에 어울릴지 걱정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괴상한 이름들이 지역 정취를 파괴하는 이상으로 사람들에게 불편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문화의 문제 이전에 정확한 정보 소통에 어려움을 주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크다.
땅이름을 연구하는 분이 많지 않아 이름 짓는 일에 전문가들이 일일이 참여할 수는 없었을 테니, 이제라도 국립국어원 같은 국책 기관을 통해 전체 도로명을 모두 조사하여 마땅치 않은 것들을 솎아내야 한다. 동 이름을 테크노동이라고 지어 웃음거리가 되었다가 다시 이름을 바꾼 어느 지자체의 실수를 전국적으로 반복할 이유는 없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길 이름에 영어를 붙일 까닭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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