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양보를 넘어 연대로

2013. 5. 26. 15:47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양보를 넘어 연대로

정년 연장이나 국민연금 등의 문제에서 정규직 노동자가 먼저 기금을 내놓고 자본과 국가의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 양보가 아니라 연대로 사업을 승화시키는 기획이다.

 

_ 오건호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실장,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일반적으로 ‘양보’는 미덕으로 여겨진다. 배려와 대범함이다. 그런데 이 단어가 노동계로 오면 쓰이는 맥락이 달라진다. 후퇴, 심지어 굴종의 의미로도 해석된다. 오랫동안 ‘양보’라는 말로 정부와 자본에게 당해온 한국 노동운동의 한 면을 반영한다. 근래 이 단어가 가장 민감하게 사용될 때는 그 주체가 정규직 노동자일 경우다. 그만큼 정규직 담론이 노동운동에게 껄끄러운 주제다. 노동계 일부에서는 ‘정규직 양보’가 대자본·부유계층의 책임을 요구하는 대신 정규직 몫을 비정규직에게 나눠주는 내부 재분배라고 비판한다.

사실 노동시장에서 힘들게 일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그렇지 대부분 정규직 노동자 역시 직장에서 잘릴까 전전긍긍하며 삶을 회사에 헌납한 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도 ‘정규직’이라는 단어로 시작하기만 하면 곧바로 방어막을 치고 수세적 자세를 취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결과 노동운동의 기능을 확장할 수 있는 사업들이 ‘정규직 양보론’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무산되곤 한다.

정년 연장에 따른 임금피크제 논란을 보자. 고령화 시대 정년 연장이 시대적 요구인 건 분명하다. 그런데 지불능력이 있는 대기업, 금융기관, 공공기관 노동자들만 혜택을 보고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는 실효성이 약할 거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에 정규직 노동자들의 정년 연장 과정에서 재원을 마련해 이를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 삭감 없는’ 정년 연장에 사용하자는 의견이 나온다.



병원비 ‘100만원 상한제’로 가는 길


이 방안은 기업에게 아무런 부담을 지우지 않고 노동자끼리 임금을 나누는 노동자 몫의 재분배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기업은 정년 연장 노동자에게 기존 수준으로 임금을 지불하기에 그 자리를 다른 노동자로 대체했을 경우와 비교해 비용을 추가 부담한다. 노동자는 보전받은 임금의 일부를 저임금 노동자 정년연장기금으로 제공한다. 대기업은 정년 연장에 따른 재정 책임을 맡고 해당 기업 노동자는 정년 연장을 얻되 보전된 임금 일부를 저임금 노동자의 정년 연장을 위한 마중물, 윤활유로 사용한 셈이다. 이것이 불편한 양보일까? 진취적인 연대일까?

몇 년 전에 저임금 노동자에게 국민연금 보험료를 지원하자는 진보 진영의 ‘사회연대전략’이 정규직 양보론이라는 비판을 넘지 못해 좌초했다. 이 사업은 약 600만명의 저소득 계층에게 5년간 총 17조원의 국민연금 보험료를 지원하자는 제안이다. 정규직 노동자 4조원, 정부 6조원, 자본 7조원을 마련하는데, 노동자 몫 4조원이 논란의 대상이었다. 비정규직의 국민연금 사각지대 원인을 정규직 노동자에게 돌리는 ‘정규직 책임론’이라는 것이다. 이 4조원은 미래에 받게 될 연금급여의 극히 일부를 불안정 노동자의 연금보험료 지원금으로 전환한 재원으로, 정부·자본 몫 13조원을 끌어들이는 매칭기금이었다. 600만 연금 사각지대 동료를 위한 이만큼의 기여가 노동운동에게 굴종일까, 연대일까?

모든 병원비에 ‘100만원 상한제’를 적용하기 위해 가입자·정부·기업 각각 국민건강보험료를 더 내자는 ‘건강보험 하나로’도 비슷한 사례다. 1인당 평균 1만원씩 더 내자는 이 운동 역시 노동계의 다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자본이 감당해야 할 재정 책임을 왜 우리 노동자가 맡아야 하느냐는 게 반대 논리의 골자다. 그런데 가계비를 더 지출하자는 게 아니다. 각자도생으로 민간 의료보험에 의지하지 말고 그 보험료의 3분의 1만 국민건강보험으로 돌려 병원비를 함께 해결하자는 것이다. 이게 바로 ‘연대’ 아닌가?

자본의 처지에 서서 보면 의외로 답이 쉽다. 임금 삭감 없는 정년 연장만을 요구하는 노동자와 저임금 동료의 정년 연장 재원으로 사용할 테니 기존 임금 수준대로 지불하라는 노동자 중 누가 더 부담스러울까? 전자는 해당 노동자만 상대하면 되지만 후자는 전체 노동자, 어쩌면 전체 사회를 대면해야 한다. 광범위한 국민연금 사각지대에 처한 노동자 지원을 위해 우리도 4조원을 조성할 테니 정부·기업도 그 책임을 지라는 노동자의 제안을 쉽게 무시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연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제는 실천할 때다. 스웨덴의 연대임금제를 부러워만 하지 말고 우리 현실에서 구체적 씨앗을 찾아내자. 과감히 ‘정규직 양보’ 담론을 넘어서야 한다. ‘양보’라는 단어가 불편하다면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이 사업의 본령은 ‘연대’다. 그래야 노동이 강해진다. ‘양보론’을 넘어 노동자가 함께 손을 잡는 ‘연대론’으로 사업을 승화시키는 기획, 노동정치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