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시민 주도 복지증세

2015. 2. 7. 14:30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오건호 |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새누리당 지도부마저 증세를 말한다. 얼마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시민들은 취약한 과세형평성과 부적절한 재정지출로 세금을 불신하고, 대기업은 경제활성화 논리로 증세에 맞서 왔다. 지혜로운 ‘증세정치’가 요청된다. 증세는 어느 세목을,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걷을까가 논점이다.

우선 세목은 간접세와 직접세로 구분된다. 최근 담뱃세가 인상됐고 정부 주변에서 부가가치세 인상 이야기가 꾸준히 나온다. 하지만 한국 조세체계의 근본 문제는 직접세에 있다. 간접세 인상은 법인세·소득세 등 직접세를 보강한 후에 논의하는 게 적절하다.

시민들의 관심이 가장 큰 세목은 법인세다. 경제계는 한국의 법인세 세수가 2012년 국내총생산(GDP)의 3.7%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2.9%보다 많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그만큼 기업들이 국민소득 중 많은 몫을 가져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대기업은 상당한 이윤을 얻고 있음에도 세금 감면 특혜까지 받아 중견기업보다 오히려 실효세율이 낮다. 2012년 이윤이 5000억원 넘는 대기업의 실효세율은 17.1%로 50억~5000억원 이윤 기업 17.3~19.1%에 못 미친다. 이명박 정부에서 법인세를 25%에서 22%로 내렸고 세금 감면은 올해 연구개발비 항목만도 2조원 가까이 된다. 외국의 절반에 불과한 사회보험료 기업 몫까지 감안하면 법인세율 인상과 대기업 감면 축소를 조속히 단행해야 한다.

국제 기준 세수 규모에서 가장 빈약한 세목이 소득세이다. 소득세 대상은 근로소득 외 사업·금융·양도 등 다양한데 항목마다 허점이 있다. 근로소득은 지나치게 공제가 많다. 2013년 근로소득 503조원 중 60%인 306조원이 과세 대상에서 공제돼 나머지 40%, 197조원에만 세금이 부과됐다. 누진세율이 적용되는 몫보다 역진적 소득공제가 더 많으니 소득세의 재분배 효과가 미미하다. 또한 2000만원까지는 적용되지 않는 금융소득종합과세, 보유주식이 50억원을 넘지 않으면 세금이 면제되는 주식양도차익, 과세행정이 닿지 못하는 임대소득, 성역으로 남아 있는 종교인 과세 등도 손봐야 할 대상이다. 근로소득에선 공제를 줄여가고 금융·양도·임대·종교인 소득 등 과세 틈새를 메우면서 전반적인 세율 인상도 요청된다. 다른 직접세로는 부동산 편중이 심한 한국에서 종합부동산세도 노무현 정부 수준으로 원상회복하고, 사실상 불로소득에 가까운 상속증여액 과세도 강화해야 한다.

어떻게 증세할까? 각 세목별로 추진할 수 있다. 지금까지 야권과 시민사회가 주로 제안한 방식이다. 이럴 경우 세목 종합상자가 너무 복잡하다. 시민이 이해하기 어렵고, 세목별 이해관계자도 다양하다. 더 거둔 세금이 제대로 쓰일지 의구심도 남는다. 그렇다면 과세 틈새 개혁을 추진하되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증세 방안으로 법인세·소득세·종합부동산세·상속증여세 등 핵심 직접세목의 인상분은 모두 복지에 사용하도록 정하는 복지목적세는 어떨까? 바로 복지에만 쓰는 세금, 사회복지세이다. 한국은 일반예산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대적 과제가 있을 때마다 목적세를 도입해 왔다. 과거 방위세, 지금 교육세가 그렇다. 사회복지세는 재정지출 불신을 우회하며, 증세 경로를 하나의 세목으로 단일화하고, 세금이 어떻게 쓰일지 설명할 수 있어 증세 동의를 이끌기 유리하다.

누가 더 내도록 할까? 복지로 되돌아오는 게 명확하다면 중간계층부터 증세에 참여하도록 하자. 이번 연말정산에서 아이를 가진 중간계층이 연간 몇만원을 더 내지만 무상보육으로 얻은 혜택은 수백만원에 이른다. 복지를 누리게 된 시민들도 자신의 조세 책임을 다한다면, 여기서 조성된 자부심은 상위계층, 대기업의 누진과세를 구현하는 실질적 에너지가 될 것이다.

증세의 핵심은 ‘정책’이 아니라 ‘정치’에 있다. 자신의 요구를 정식화한 것이 정책이라면 이것을 위해 사회적 힘을 모으는 게 정치이다. 지금까지 야권과 시민사회는 정책으로 부자증세를 선언해 왔을 뿐이다. 이제는 복지와 세금을 결합해 증세의 정당성을 확장하고, 복지를 누리게 된 중간계층부터 누진증세에 참여해 부자와 대기업을 압박하는 증세정치가 요청된다. 선언적 부자증세를 넘어 시민주도 복지증세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