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천만다행] 복지의 불균등 발전

2014. 11. 3. 17:27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송파 세 모녀가 남긴 유서. 세 모녀 사건 이후 기초생활보장제 개선 논의가 일어났다.




요즘 내가 주목하는 복지 관련 핵심어는 ‘불균등 발전’이다. 급식, 보육, 기초연금 등에서 보편적 복지가 확대되고 있건만 정작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복지는 제자리에 멈추어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수급자 130여만 명의 3배에 이르는 약 400만 명의 빈곤층을 사각지대에 방치한다. 올해 7월부터 기초연금이 최고 20만 원으로 올랐건만 가장 가난한 노인인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약 40만 명은 기초연금을 받은 만큼 생계급여에서 삭감돼 결국 아무 혜택도 누리지 못한다. 2008년 기초노령연금이 도입되기 이전에는 그나마 경로수당, 교통수당을 생계급여와 별도로 받았는데 기초연금 ‘줬다 뺏기’ 과정에서 이마저도 박탈당했다. 보육, 기초연금 대응예산 마련에 허리가 휘는 지자체들은 지역 취약계층에게 주로 제공되는 자체 복지사업을 추진할 여력을 잃어가고 있다. 어려운 사람을 더 힘들게 하는 복지의 ‘역진적’ 불균등 발전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지는 제자리걸음



올해 7월부터 기초연금이 최고 20만원으로 올랐건만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약 40만 명은 기초연금을 받은 만큼 생계급여에서 삭감돼 결국 아무 혜택도 누리지 못한다.






상황은 개선되기보다 더 나빠질 듯하다. 지자체와 중앙정부 사이에 복지예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서울의 몇몇 자치구는 기초연금 재원을 마련하지 못해 디폴트 선언을 검토 중이다. 내년부터 누리 과정(3-5세) 예산을 전액 책임지게 된 교육청들도 아예 예산 편성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단지 교섭력을 높이려는 ‘약속대련’이 아니다. 지자체들은 절벽에 서 있다.


중앙정부가 보육, 기초연금 확대를 결정했기에 이에 따른 지자체 대응예산도 중앙정부가 책임지는 게 이치에 맞다. 그런데 중앙정부 역시 살림이 심각한 상태에 있다. 올해 세수가 애초 계획에 비해 10조 원 이상 부족해 재정적자가 35조 원대에 이를 전망이다. 국회에 제출된 예산안에선 내년에도 적자가 34조 원이다. 아무리 지자체가 아우성쳐도 중앙정부가 선뜻 대답을 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복지에도 직격탄으로 영향을 미친다. 당장 보육, 기초연금 예산에 허덕이는 지자체들이 내년에 자체 복지사업을 제대로 펴기 어렵다. 상대적으로 재정자립도가 높은 서울시 역시 그러하다. 중앙정부 역시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복지 향상에 소극적일 개연성이 크다. 올해 초 송파 세 모녀의 죽음을 보면서 모두가 기초생활보장제도를 고치겠다고 나섰다. 국회에는 여야 국회의원들이 낸 법 개정안이 수북이 쌓여 있다. 11월 국회에서 기초생활보장법 개정 작업이 마무리될 듯한데, 과연 지금보다 얼마나 진전된 내용을 채울 수 있을까?


정부는 현행 통합형 급여체계를 맞춤형 개별급여체계로 전환하는 것을 마치 대단한 개혁인양 홍보한다. 물론 복지 욕구에 따라 개별급여를 계층별로 다양하게 설계하는 일은 필요하다. 하지만 이게 기초생활보장제도가 풀어야 할 근본 과제는 아니다. 문제는 빈곤한 사람들을 계속 복지 사각지대에 밀어 넣는 수급선정기준에 있다. 비현실적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기준이 너무 엄격하다. 자식에게 제대로 부양받고 있지 못한데도 부양의무자가 있다며 수급 자격을 주지 않는다. 돈 한 푼 나오지 않는 전세금을 소득으로 환산해 소득인정액을 부풀린다. 일하기 힘든 조건에 있는데도 어디선가 돈을 벌고 있을 거라며 추정소득을 매긴다. 1999년 계측 당시 중위소득 대비 45%에 달했던 최저생계비는 현재 36%대로 낮아져 있다. 수급액을 계산할 때 상한선 역할을 하는 최저생계비는 계속 하향하고 하한선 역할을 하는 소득인정액은 가공의 소득으로 채워지니 가난해도 수급자격을 얻지 못하거나 혹 수급자가 되더라도 받는 급여가 빈약하다.


어느새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된 지 15년째다. 처음에는 시행 초기라 변명한다지만 15년이 지나도 문제가 그대로라면 부끄러운 일이다. 지난 몇 년간 복지 바람이 불었다는데 이 효과조차 여기에는 없었다. 복지 학자, 사회복지사, 복지기관, 복지시민단체들이 가난한 사람의 복지에 더 과감해져야 한다. 기존의 방식으로 지금 수준을 넘을 수 없다. 오히려 복지의 불균등 발전마저 초래되고 있지 않은가?


사회복지세 도입으로 복지재정 마련해야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획기적인 개혁방안을 마련하고 요구하자. 예산 제약에 자유롭기 어려운 관료, 주류 학자의 눈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 사는 복지 현장의 눈으로 대범해지자. 정부가 내놓은 개정안은 송파 세 모녀의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두 딸은 일할 수 없음에도 추정소득을 계속 부과받을 것이다. 정부가 부양의무자제를 완화한다지만 이로 인해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 약 120만 명 중 단지 12만 명을 포괄할 뿐이다. 소득이 발생하지 않는 주거 필수재산까지 소득환산율이 적용되는 재산의 소득환산도 그대로 남는다. 이제는 가공의 소득을 만들어내는 부양의무자, 필수 주거재산의 소득환산, 추정소득 등을 아예 없애는 운동에 나서야 할 때가 아닐까?


또 하나는 복지재정 마련을 위한 주민운동이다. 중앙정부를 탓하는 건만으론 답이 나오기 어렵다. 중앙정부가 실제 세입 확충에 나서도록 지역주민의 압박활동이 필요하다. 나는 사회복지세 도입 운동을 주목한다. 사회복지세는 복지에만 쓰도록 사용처가 정해져 있어 재정지출에 대한 불신이 큰 사회, 또한 복지 열망이 커가는 사회에 적합하다. 바로 우리나라이다. 중앙정부의 재정 불안이 임계점에 도달하는 내년 상반기에 본격적인 증세 논의가 펼쳐질 듯하다. 지금부터 증세의 필요성을 공론화하며 지자체 공간에서 지역주민이 참여하는 활동 기획이 필요하다. 내가 속한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등 몇몇 복지단체는 작년부터 매주 토요일 거리에서 사회복지세를 홍보하는 활동에 나서고 있다.


사실 과거에는 지역주민을 복지 개혁의 주인공으로 제안하기 어려웠다. 지역엔 관변화된 중개인들만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근래 서울시 곳곳에서 마을공동체가 꿈틀대고 있다. 협동조합, 텃밭 등에서부터 다양한 소모임까지 주민들이 생활하는 공간에서 서로를 만나고 있다. 서울시도 기존 주민센터를 마을 복지 허브로 재편하고자 한다. 아직은 시작이지만 '아래로부터 복지주체'가 형성되는 복지 지형이 조성되고 있다.


지난 3~4년 대한민국 복지 변화를 상징하는 핵심어는 '보편 복지'였다. 급식, 보육, 기초연금 등에서 조금씩 복지체험을 전하며 복지가 시혜가 아니라 권리라는 인식을 일깨워주었으나 동시에 복지예산 압박, 복지의 불균등 발전이라는 한계도 드러냈다. 이 한계가 바로 우리 앞에 놓인 숙제이다. 지역주민이 이 문제를 풀어가며 복지국가 만들기의 주역으로 나서자.

 
 


오건호 |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