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론> 내만복칼럼 "실버? 홈리스? 그룹홈? 우리말로 쓰면 안 되나요?"

2014. 10. 28. 16:41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내만복칼럼 "실버? 홈리스? 그룹홈? 우리말로 쓰면 안 되나요?"(애초 제목)에 대해 홈리스행동 이동현 상임활동가가 반론 글을 보내왔습니다. 필자의 요청대로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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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를 ‘노숙인’으로 대체하자는 주장에 대한 반박


 

이동현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

 

시혜적 복지 철학이 용어에 남아 있다


 

이런 말들에는 어떤 복지 철학이 담겨 있을까? 급여라는 말에는 국가가 어려운 사람에게 시혜를 베푼다는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다. 노인을 실버로, 노숙인을 홈리스로 부르는 것 역시 사회의 아픔을 직시하며 정면으로 대응하려는 태도보다는, 뭔가 숨기고 불편한 것을 피해가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복지를 공동체 성원 모두의 문제로 국민 마음 속에 심으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

 

-<실버? 홈리스? 그룹홈? 우리말로 쓰면 안 되나요?> 중


 

지난 2014년 10월 19일, ‘내가 만드는 복지 국가’의 뉴스레터에 게재된 <실버? 홈리스? 그룹홈? 우리말로 쓰면 안 되나요?>(한글문화연대 대표/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 이건범) 라는 글에 실린 ‘홈리스’ 사용에 대한 반박이다. 해당 글은 ‘홈리스’를 제목으로 뒀지만 내용 상 비중은 주장을 보충하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부적절한 사례 하나에 대한 과민 반응 아닌가하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나는 ‘홈리스’란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측으로, 그런 주장에 충분히 수긍한다. 허나, 이건범 대표가 용어 하나하나에 집중하듯, ‘홈리스’란 용어 역시 그만한 집중의 가치가 있다 보기에 불필요한 일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또한 과거 한글문화연대가 ‘노숙인 등’의 복지 제도화 과정에서 보였던 입장, 영향에 대해서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 ‘홈리스’는 은폐의 용어가 아니다.

 

‘홈리스’란 용어에 은폐의 의도가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이건범 대표는 노숙인을 홈리스로 부르는 것이 사회의 아픔을 정면으로 대응하기보다 뭔가 숨기고 피해가려는 의도가 있다 주장한다. 이는 사실과 반대다.

 

2010~2011년 ‘노숙인등의복지및자립지원법’을 제정할 때 정부와 여당은 ‘노숙인’이란 개념을, 야당과 시민사회진영은 ‘홈리스’란 용어를 주장했다. 물론, 당시에도 한글문화연대는 법제처, 문화체육관광부, 법무부 등과 함께 법제명을 ‘노숙인’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법제명은 ‘노숙인 등’으로 정책대상을 정의했는데, 결국 지원 대상으로 언급된 다양한 주거취약계층은 개념정의 없이 ‘등’으로 표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주거취약계층이 ‘기타’로 치부되는 언어적 배제만의 문제는 아니다. 실제 ‘노숙인등 복지’ 정책상 일부 쪽방 주민을 제외하고 고시원, 만화방, 다방 등 다양한 주거취약계층이 받을 수 있는 복지 지원은 아무것도 없다.

 

2005년부터 시행된 개정 사회복지사업법 시행규칙에 명명된 ‘노숙인’이란 용어가 지칭하는 ‘거리생활자’, ‘시설생활자’란 범주가 제정 법률에서도 그대로 영향력을 발휘하며, 그 범주를 벗어난 주거취약계층을 무권리 상태로 만든 것이다. 당시, 여당과 여러 정부부처가 ‘홈리스’란 용어를 거부한 이유는 ‘외래어’란 이유였다. 당시의 법안 심사, 검토보고서에서도 나와 있듯 한글문화연대의 ‘홈리스’ 용어 사용 반대 입장은 정부와 여당 입장을 관철하는 도구로 충실히 사용되었다. 그러나 정부, 여당이 홈리스란 용어 사용을 반대한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맥락, 즉, 정책 대상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와 여당은 “뭔가 숨기고 피해가려는” 의도로 ‘노숙인’이란 용어를 선택한 것이다.

 

2. ‘노숙인’은 과연 적합한가?

 

‘노숙인’이란 용어의 적합성에 대한 지적이다. 나는 언어의 고유 특질은 적합성에 있다 본다. 언어는 지칭하는 대상을 오해 없이 표상하기 위한 약속 기호로서 역할해야 한다. 현재 ‘노숙인등 복지법’ 상 지원 대상은 1)거리노숙, 2)노숙인시설 생활자, 3)부적절 주거 거주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슬을 맞고 자는 사람”이란 뜻의 ‘노숙인’이란 용어가 이 세 주거형태를 표상하기에 과연 적절한가? 노숙인이란 용어는 ‘거리노숙’ 상태에 처한 이들 중 일시보호시설이나 응급잠자리, 지하도나 처마, 대합실 통로 등을 이용하지 않는, 오로지 연속적으로 한뎃잠을 자는 사람만을 지칭할 뿐이다. 언어 사용에 일부러 왜곡을 전제할 필요는 없다. 해당 언어의 뜻이 지칭하는 대상과 괴리가 있다면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3. ‘한글’, ‘사람’과 함께 소중하다

 

한글문화연대 홈페이지에 보니 이건범 대표는 “국어는 곧 인권이라는 평소의 믿음”이 있다고 한다. 노숙인이든 홈리스든, 언어와 사람이 분리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상태를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교감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건범 대표는 ‘노숙인’이란 용어의 주장을 하기 앞서 그 상태를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얼마만한 접점을 가졌으며, 그들의 현실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물론 한글문화연대가 홈리스 운동단체는 아니다. 그러나 홈리스에게 영향을 미칠 무언가의 활동을 하기로 했다면 그 파장에 속한 사람들을 만나고, ‘노숙인’이란 용어가 그것이 지칭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규정력을 행사하는 지 탐구했어야 했다. 왜 1,531명이나 되는 홈리스 당사자들이 일일이 연명해 ‘홈리스 복지법’ 입법청원안을 제출했으며, 노숙인 내지 홈리스복지 법안을 발의한 의원실들을 쪽방촌 내 공원으로 불러 방사능비를 맞으며 현장설명회를 통해 노숙인이란 용어를 폐기하도록 요구했을까 물었어야 했다. 이러한 노력을 생략한 이건범 대표의 노숙인 내지 홈리스에 대한 용어 주장은 현실과 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