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IN] ‘보편복지’가 ‘기본 소득’에게

2013. 12. 19. 01:45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시민이면 누구에게나 일정 생활비를 제공하자는 게 ‘기본 소득’이다. 보편복지든 기본 소득이든 시민들과 소통하며 한국 사회의 문제를 풀어가는 데서 생명력을 입증해야 한다.

 

 

_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나는 보편복지를 지지한다. 스웨덴식 모델을 선호하기 때문에 넓게 보면 전통적 복지국가론의 흐름에 서 있다. 지금까지 보편복지는 선별복지와 맞서 왔는데 다른 방향에서 비판도 있다. 바로 기본 소득이다. 불안정 노동이 만연한 현대 시장경제에서 보편복지 역시 이들을 방치하는 노동 연계 선별복지라는 게 비판의 골자다. 보편복지가 실업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저임금에 시달리는 불안정 노동자들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시민이면 누구에게나 자격을 따지지 않고 일정 생활비를 제공하는 기본 소득만이 해법으로 제안된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진보정당 계열의 김순자 후보는 15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월 33만원을 지급하겠다고 제안했고, 한국에서 기본 소득 운동을 주도하는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에서는 연 300만원 혹은 600만원 지급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내가 이해하기에 기본 소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신념이 매우 강하다. 최근 스위스에서 ‘기본 소득을 위한 국민 발의’가 이루어진 것도 힘을 더하게 한다. 그래서인지 이들 기본소득론자들은 전통적 복지국가론에 대해서 쉽게 비판의 날을 세운다. 보편복지 담론이 “1970년대 이후 생명력을 다한 낡은 복지국가 패러다임으로의 귀환”이란다.

나는 현재 불안정 노동의 심각성에 깊이 공감한다. 사실상 완전고용을 전제로 설계되었던 전통적 복지국가 모형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점도 잘 안다. 기본 소득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 답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럼에도 기본 소득의 견해에 서 있지는 않다. 우리가 처한 조건에서 여전히 보편복지가 문제를 푸는 경로를 개척해가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대한민국 복지 논쟁은 사회서비스(급식·보육·의료)와 사회수당(기초연금·양육수당)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계층에 따라 지급하자는 선별복지에 맞서 보편복지는 아이라면 무상보육, 학생이라면 무상급식과 무상교육, 대학생이라면 반값 등록금, 환자라면 100만원 상한제, 노인이라면 기초연금을 공평하게 제공하자고 주창해 왔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박근혜 정부의 역주행에 맞서 보편주의 기초연금을 정착시켜야 하고, 서구 나라들처럼 아이에게는 아동수당, 대학생에게는 학업수당을 요구해갈 것이다. 보육·의료·요양 등 민간 부문 중심의 사회서비스 인프라를 공공 영역으로 전환하고 확장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생명력을 다한 낡은 패러다임인가?

기본 소득이 근본적으로 문제시하는 영역은 불안정 노동자의 복지이다. 전통적인 실업급여 제도에서는 불안정 노동자를 제대로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가 존재한다. 이에 보편복지는 노동시장 구조를 안정적 방향으로 개혁하면서 노동자에게는 실업급여 자격 요건을 완화하고 영세 자영업자에게는 실업부조를 도입하고자 한다. 이들도 실업급여를 누리도록 하려는 것이지만 여전히 틈새가 남을 수 있다.

기본 소득을 위해 필요한 정책수단 비용 막대해

이에 비해 기본 소득은 매력적이다. 모두에게 기본 생활비를 보장하므로 사각지대 문제를 명확하게 해소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해 동원되는 정책수단의 비용이 너무 막대하다. 기본 소득은 행정 비용의 절감을 강조한다. 하지만 어차피 적은 금액으로 시작할 거라면, 기본 소득이 현재의 실업급여 금액을 넘어서기 이전까지는 별도로 실업급여, 기초생활보장급여가 유지돼야 하기에 행정 비용에선 크게 변화가 없을 것이다. 급여 방식에서도 소득이 있는 사람까지 포함해 모두에게 일괄적으로 지급하기보다는 청년 노동자에게는 청년수당, 저임금 노동자의 경우 사회보험료 지원 등 집단의 특성에 따라 제공하는 게 훨씬 대중적 설득력을 지니리라 생각한다.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기본 소득을 보장하는 공동체는 ‘잠정적 유토피아’의 한 유형으로 볼 수 있다. 나 역시 기본 소득 사회가 도래한다면 반길 것이다. 하지만 잠정적 유토피아의 강점은 그것이 갖는 당위성에 있지 않다. 그 좌표를 향해 나아가는 ‘현재’를 이끌어줄 수 있어야 한다. 기본 소득의 위력은 전통적 복지국가론과 다르다는 차별성보다는 지금 쟁점에 대한 개입력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나는 기본 소득이 더 구체적으로 복지 논쟁에 참여하기 바란다. 예를 들어, 모두에게 30만원을 주자고 제안하면서 보편복지의 노동시장·실업급여 중심 개혁론과 견주어가기 바란다. 둘 다 당장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면, 시민들과 소통하며 직면한 문제를 풀어가는 데서 자신의 생명력을 입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