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창비논평] 기초연금 사태와 짓눌리는 민주주의

2013. 12. 1. 15:53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창비주간논평] 아무도 의심할 수 없었던 교묘함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올해 기초연금 사태를 보면서 민주주의의 중대한 훼손을 절감한다. 국가기관의 선거개입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게 아니다. 기초연금 공약 논란에서 드러난 선거민주주의, 정책민주주의의 왜곡 역시 심각하다.

복지시민단체 일원으로 작년 대통령선거에서 후보들의 복지공약을 점검하면서 내가 가장 관심을 둔 게 기초연금이었다. 야권에서는 오래전부터 노인 80%에게 2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공언해왔다. 이에 맞서 박근혜 후보가 어떠한 공약을 내놓을지 궁금했다. 5년 전 대선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모든 노인에게 2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이 경우 소요재정이 현행 약 4조원에서 12조원으로 크게 늘어나기에 박근혜 후보가 이번에도 주장할지가 주목되었다.

아무도 의심할 수 없었던 교묘함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새누리당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당시 박근혜 비대위원장이었다. 새누리당 총선 공약집에 기초연금 항목은 없었다. 야권을 향해 복지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하는 입장이어서 기초연금 같은 대형공약을 담기 어려웠다. 대선은 달랐다.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단일화 합의문을 발표하기 하루 전날, 마침내 박근혜 후보가 기초연금 공약을 내놓았다. 대한노인회를 방문한 자리에서 모든 어르신에게 20만원을 드리겠다며 문재인 후보보다 더 강력한 카드를 꺼냈다.

이후 나는 박근혜 후보의 기초연금 공약을 검증하고자 했으나 구체적인 자료를 접할 수 없었다. 기초연금이 담긴 최종 공약집은 대통령선거 8일 전에야 나왔다. 공약집은 분명 '2013년에 기초연금법을 도입하고 즉시 모든 어르신과 중증장애인에게 20만원씩 지급'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현행 기초노령연금을 기초연금화하고 국민연금과 통합운영'한다는 문구도 적혀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 현재 노인 70%에게만 지급되는 기초노령연금을 모든 노인에게 적용하니 완전 보편연금으로서 이름을 '기초연금'으로 고치고,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의 관리운영을 국민연금공단으로 통합한다고 말이다. 이 문구를 기초연금 금액과 관련이 없는 내용으로 이해했고 그래서 특별히 문제를 느끼지 않았다. 언론도, 야당도 역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이 거리 현수막, 홍보지 등에서 '기초연금 20만원'을 거듭 확인하고 있는데, 이를 의심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할 때

그런데 선거를 며칠 앞두고 새누리당 홈페이지에 공지된 공약소요재정 자료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임기 중 기초연금 추가 소요재정이 14.7조원이라고 제시돼 있었다. 임기 첫해를 빼고 2014~2017년에 공약을 이행하더라도 중앙정부가 감당해야 할 추가 재정이 25조원인데, 재정자료집에는 이 금액의 59%만 명시된 것이다. 선거가 임박해 게시된 탓에 대부분 사람들이 이 자료의 존재를 몰랐고 혹 보았더라도 질문을 제기할 틈도 없이 투표를 맞아야 했다.

우려했던 의문에 대한 답은 박근혜 당선인의 입에서 직접 나왔다. 1월 28일 박근혜 당선인은 인수위원회 국정과제 토론회에 참여해 기초연금 공약의 실체를 이례적으로 소상히 설명했다. 국민연금 연금액 중 균등급여라고 불리는 금액과 합쳐서 20만원을 만드는 게 자신의 기초연금이라고 말이다. 국민연금과 연계해 기초연금을 차등지급하겠다는 게 골자인데, 근래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 기초연금 공약을 만들었던 안종범 의원 역시 공개적으로 이를 사실로 확인해주고 있다.

지난 9월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 자리를 빌려 기초연금 공약을 지키지 못한 것을 사과했다. 경기침체로 세수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을 이유로 들었지만 이는 진실과 다른 핑계이다. 공약 소요재정 자료, 박근혜 당선인의 설명, 새누리당 지도부의 확인 발언 등을 종합할 때, 기초연금 공약은 처음부터 모든 노인에게 20만원을 지급하는 게 아니었다. 경제가 어려워져 공약을 축소하는 게 아니라 애초 국민에게 거짓으로 알린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 10월 입법예고된 정부의 기초연금 법안에는 지금까지 논의과정에서 한번도 다루어지지 않았던 독소조항이 슬그머니 들어가 있다. 현행 기초노령연금은 국민연금 가입자 평균소득(A값)의 5%, 금액으로 약 10만원이다. 이는 매년 A값과 연동해 인상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런데 입법예고안의 기초연금은 매년 물가와 연동해 오른다. A값보다 증가율이 낮은 물가를 따르도록 해 시간이 지날수록 급여율이 낮아지도록 설계도가 변경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초연금은 첫 해는 A값의 10%로 시작하더라도 대략 20년 후면 5%로 반토막 난다. 지금까지 공론장에서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던 항목이 갑자기 공약 수정 논란 과정에 들어와 기초연금의 기본 골격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제 시작되었다

11월 19일 정부가 최종 입법안을 확정했다. 기초연금액을 매년 물가와 연동하여 인상하되 5년마다 보건복지부장관이 물가, 노인 생활수준, A값 증가율 등을 고려하여 조정하도록 약간 수정되었다. 하지만 결국 물가연동 방식이고 노인층의 핵심 복지인 기초연금액을 국회 동의 없이 주무장관이 결정한다는 점에서 문제의 본질은 그대로 안고 있다.

서구 나라들을 보면, 연금정책은 고령화시대의 미래가 걸린 다루는 중대한 사안이기에 오랜 숙의를 거쳐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방식으로 결정돼왔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선거과정에서 국민을 속이는 '공약 사기'가 버젓이 행해지고, 입법과정에서는 사전논의도 없이 독소조항이 삽입되는 '일방통행'이 진행되고 있다.

곧 국회에서 법안심의가 시작될 것이다. 야권은 법안에 반발하면서도 마냥 논의를 미룰 수 없는 처지에 있다. 내년 7월부터 기초연금이 최고 20만원까지 오르는 게 지연될 경우 불어올 후폭풍이 크기 때문이다. 당장 6월 지방선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박근혜정부가 이러한 상황을 활용해 법안통과를 강행한다면 국회심의 과정마저 파행을 겪을 게 불을 보듯 뻔하다. 기초연금 사태에서도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짓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