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정동칼럼] 복지체험

2013. 9. 18. 17:16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오건호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실장,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내일이 추석이다. 우리나라 명절 자리에선 정치 이야기가 단골 메뉴다. 정치를 신뢰하지 않지만 세상이 바뀌길 바라는 심정 때문이리라. 국정원, 내란음모, 검찰총장 등이 술상 위로 오르겠지만 복지 이야기도 오고 가면 좋겠다. 당장 무상보육 비용을 둘러싸고 중앙정부와 서울시가 줄다리기를 벌이고, 경기도에선 내년 무상급식 예산을 두고 김문수 도지사와 김상곤 교육감이 갈등을 빚고 있다. 서울시와 경기도가 대표선수로 나섰을 뿐 모든 지자체에서 사정은 비슷하다. 어떻게 예산 비중을 조정하든 필요한 돈은 결국 시민과 기업의 몫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은 시민들에게 세금 주제를 꺼내기 어렵다고 말한다. 세금 정의가 제대로 서지 못한 게 주요 이유이다. 그런데 조세 개혁은 상당히 시간이 걸리는 숙제인 반면 복지 확대는 현재 진행형이다. 재정을 마련하지 못해 보편복지가 시험대에 선 까닭이다. 지난 복지논쟁에서 복지 확대가 힘을 얻게 된 배경에는 복지재정을 늘리겠다는 ‘약속 어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박근혜 정부든, 보편복지 세력이든 이 어음을 어떻게 지급할지 책임 있는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 어음의 부도를 막기 위한 방안으로 ‘복지에만 쓰는 세금’, 사회복지세 도입을 지지한다. 세금과 복지를 결합하면 지출 불신을 우회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복지증세가 효과를 발휘하리라 기대하는 건 근래 시민들이 지니게 된 ‘복지 체험’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주위를 보면, 보편복지를 주창하는 사람들조차 대부분 아직 우리에겐 ‘복지체험이 빈약하다’고 진단한다. 정말 그럴까? 지난 3~4년 대한민국 역동성을 보여주었던 복지의 변화를 보편복지 세력 스스로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동네 어르신들과 대화를 나누어보자. 기초노령연금으로 매월 제공되는 10만원이 그분들에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 물어보자. 모든 아이들에게 지원되는 매월 수십만원의 보육료, 2살 미만 아이에게 입금되는 양육수당 10만~20만원의 위력을. 어느새 무상급식은 학생과 부모들에게 당연한 일로 여겨지고 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국민건강보험이 있기에 동네 병원을 큰 부담 없이 드나들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어디까지 도달해야 복지체험을 말할 수 있을까? 양적 지표는 없다. 복지에 대한 생각이 시혜에서 권리로 바뀌고 있다면 복지체험에 유의미한 변화가 생기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까지 복지를 수령한다는 건 실패의 징표였고 갖가지 부정적 낙인이 따라붙었다. 선별복지의 영향이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 좋은 대학 들어가라’고 격려한 것도 뒤집어 보면 나라로부터 복지를 받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충고인 셈이다. 지금은 어떤가? 아이를 낳았으니 키우는 건 사회가 도와야 한다며 엄마들이 무상보육을 강조한다. 환자와 가족들은 중증질환 병원비만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어르신들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으면 기초노령연금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복지가 부끄러워하며 받는 시혜가 아니라 사회구성원이면 누려야 하는 권리로 자리 잡고 있다.

 

복지체험에 대한 과소평가는 박근혜 정부 복지정책에 대한 진영 논리로도 이어진다. 당선 직후부터 복지공약을 축소시키고 있는 탓에, 박근혜 정부에서 복지가 별 볼일 없을 거라는 비판이 보편복지 쪽에서 나오곤 한다.

 

공약 후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박근혜 정부에서 복지 확대가 사라지는 건 결코 아니다. 공약 기준에는 모자라지만, 기초연금도 최고 20만원까지 오르고, 4대 중증질환부터 정부 지원이 늘어나며, 고교 무상교육도 시행될 예정이다. 보편복지 세력이 박근혜 정부 복지정책을 홀대하는 동안 시민들은 일상생활에서 복지 확대를 접하고, 그것의 정치적 열매는 박근혜 정부가 고스란히 가져가게 될지 모른다.

 

근래 생겨나는 시민들의 복지체험을 중시하자. 시민들은 이제 복지를 생활에서 만나고 있는데 정작 보편복지 세력은 이를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복지가 이명박 정부에서 시작되었든, 박근혜 정부에서 확대되든 보편복지 세력은 이것이 자신이 요구하고 싸워 만든 역사적 성과임을 명확히 새기고 자랑해야 한다. 시험대에 오른 보편복지를 구할 힘은 복지를 누릴 시민에게 있다. 복지시민의 역동성을 믿고 이들과 함께 복지정치를 펴야 한다. 그래야만 선별복지 세력이 예산 부족을 이유로 ‘공약 재검토냐 증세냐’ 양자택일을 들이대도 자신 있게 복지증세를 말하며 진취적 대한민국을 제안할 수 있다. 이번 추석에는 가족과 이웃의 복지체험 이야기를 나눠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