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8. 19:57ㆍ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박근혜 정부가 세법개정안을 내놓으면서 대한민국에 난데없이 ‘세금폭탄’이 등장했다. 민주당은 서민의 삶을 짓누른다며 ‘세금폭탄 저지 특별위원회’를 결성해 국민 서명운동을 선언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서둘러 애초 원안을 철회하며 세금폭탄을 제거했다.
닷새간의 ‘세금 파동’이었다. 이번 소득세 개편의 핵심은 의료비, 교육비, 민간보험료 등의 가계 지출을 세금 계산에서 빼주는 소득공제 일부 항목을 세액공제로 전환하는 내용이다. 소득공제는 자신에게 적용되는 세율만큼 세금을 감면받기에 소득이 많은 사람에게 유리하고, 세액공제는 소득과 무관하게 동일한 세금을 환급받으니 상대적으로 저소득계층에게 우호적이다.
이번 세법개정 원안에 따르면 전체 근로소득자 중 23%가 세금을 더 내고 77%가 덜 내게 될 예정이었다. 전체적으로 하후상박 원리가 구현되었기에 전향적인 개편안으로 볼 수 있다. 논란은 세금을 더 내는 기준 소득 연봉 4천만원이 적절한가를 두고 생겼다. 연봉 4천~7천만원 근로소득자가 더 내는 연 16만원, 월 1.3만원이 서민증세, 세금폭탄이라는 비판이다. 이번 세법개정안에서 8천만원 소득자는 연 33만원, 1억원 소득자는 연 113만원, 3억 초과자는 연 865만원 더 내는 부자증세는 괜찮지만 중간계층까지 증세가 적용된 건 용납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닷새간의 해프닝으로 끝난 증세 논란
무거운 가계부채, 일자리 불안정으로 월 1.3만원도 힘겨운 게 일반 시민의 생활이다. 하지만 시민들이 일부라도 세금을 자임해야 복지 확대를 요구하는 명분이 더 강해진다. 이번 소득세 개편도 중간계층이 월 1.3만원을 부담하면 부자들이 수십만원을 더 내는 내용이었다. 이를 통해 전체 근로자의 2/3에 해당하는 이웃들이 세금 감면과 자녀장려세액 지원을 받게 된다. 월 ‘1.3만원’을 두고 세금폭탄론을 꺼내는 대신 복지재정을 더 확충하는 ‘복지증세 지렛대’로 삼을 순 없었을까?
나는 이번 세금 파동을 보면서 기존 ‘부자 증세론’의 한계를 보았다. 우리는 절대 낼 수 없고 당신들 소수만 내라는 게 부자증세다. 그래서 하위 77%가 감세 혜택을 보고 고소득자들이 수백만원의 세금을 더 책임지지만, 중간계층인 나는 어떠한 추가 부담을 질 수 없다는 이 주장을 그대로 이어가도 괜찮을까?
부자증세는 ‘부자만’ 내야한다. 서구 복지국가에서 보듯이, 이는 아래로부터의 압박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나도 내니 당신들도 제 몫을 다하라며 나설 때 비로소 부자들이 제대로 호주머니를 열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선 부자증세’를 이야기한다. 사회양극화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일반 시민의 공감을 담은 요구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논의의 폭이 넓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자에 대한 응징을 넘어 복지 재정을 확충하는 실질적인 경로를 찾아가야 한다. 이번 소득세 개편처럼 중간계층부터 누진적으로 세금을 더 내자며 부자증세와 중간계층 과세를 함께 묶어 가는 게 훨씬 위력적이고 효과적인 증세 방안이라는 게 나의 판단이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이 복지국가를 만드는 주인공으로 나서는 ‘복지주체 형성’도 기대할 수 있다.
또한 부자증세는 ‘세금만’ 이야기한다. 이 세상에서 세금 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보수는 ‘세금만’ 강조하며 조세 저항을 부추긴다. 보편복지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처럼 더 내는 ‘월 1.3만원만’ 강조하고 느닷없이 세금폭탄론을 꺼내는 게 지혜로운 일이었을까?
이제는 세금과 복지를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어느새 급식, 보육, 반값등록금에서 복지가 확대되고 있고, 곧 기초연금도 20만원까지 오르고 고교무상교육도 실시될 예정이다. 여전히 복지 체험이 부족하지만 의미있는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근래 여론조사를 보면, 복지가 확대된다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다는 사람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 인정할 것은 적극 받아들이면서 이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가야 한다.
‘부자 증세’ 아닌 ‘복지 증세’를
나는 보편복지 세력이 전통적으로 주창해 왔던 ‘부자 증세’ 슬로건을 ‘복지 증세’로 전환하자고 제안한다. 복지 증세는 세금과 복지를 결합하고 중간계층부터 동시에 누진과세한다. 이를 위해 사회복지세를 도입하자.
사회복지세는 기존 소득세, 법인세, 상속증여세, 종합부동산세 등 직접세에 20% 단일세율을 부과하는 복지 목적세이다. 이렇게 거둔 연 20조원은 모두 복지에 사용된다. 모든 노인과 장애인에게 20~30만원 기초연금, 모든 아이에게 월 10만원의 아동수당을 지급하고, 고교무상교육, 실질적인 반값등록금을 실시하고, 국공립 보육 및 요양시설을 대폭 확충할 수 있다.
사회복지세는 4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복지 증세’. 사회복지세는 모든 세입을 복지 지출에 사용한다. 재정 지출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감안할 때, 지금은 세입과 복지 지출을 결합하는 ‘복지 증세’가 제 격이다.
둘째, ‘누진 증세’. 사회복지세는 상위 계층과 대기업에게 더 많은 재정 책임을 적용한다. 사회복지세가 부가되는 직접세들은 모두 누진도를 가지고 있어 여기에 20%의 단일세율이 적용되더라도 전체 세입구조는 누진도를 유지한다.
셋째, ‘보편 증세’. 사회복지세는 근래 부상하는 보편 복지 흐름에 맞추어 가능한 많은 사람이 증세에 참여하도록 한다. 그래야 시민들도 복지국가 만들기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으며 상위 계층과 대기업에게 더 많은 책임을 이행하라고 압박할 수도 있다.
넷째, '단일 증세'(One-Point 증세). 사회복지세는 국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단일세목, 단일세율로 작동한다. 소득세, 법인세 등 각 세목들을 병렬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이 세목들을 사회복지세 하나로 묶고 요구를 단순화할 수 있다.
나는 얼마나 사회복지세로 내게 될까? 4인가구의 경우, 월소득 200만원 이하는 더 내지 않고, 월 300만원 소득자는 지금 내는 소득세 월 3만원에서 1/5인 월 6천원을 더 내고, 중상위계층 이상은 누진적으로 더 책임진다. 월 500만원 소득자는 5만원, 월 1천만원 소득자는 24만원, 5000만원 소득자는 330만원이 사회복지세 몫이다. 사실상 부자증세 효과도 거둔다.
대한민국은 역사적인 과제에 직면할 때마다 재원 확보를 위해 목적세를 만들어 왔다. 1970년대 자주국방을 위해 방위세, 80년대 미래 세대를 위해 교육세, 90년대 WTO 가입에 따른 농어촌 지원을 위해 농어촌특별세를 도입했다.
2013년 대한민국은 어떠한 세목을 필요로 하는가? 사회복지세이다. 지난 8월 8일 내가만드는복지국가 등 4개 복지시민단체는 사회복지세 도입 청원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거리 홍보 및 서명전에 나서고 있다. 형편에 따라 골고루 사회적 책임을 나눠 맡는 공동체, ‘함께 사는 대한민국’을 꿈꾸며 나도 매주 사회복지세 도입 운동에 나선다.
글 | 오건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 이 글은 서울시복지재단 웹진 '천만다행' 2013년 9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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