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경이 만난 사람] “기초연금 공약은 애초부터 기획된 사기”

2013. 9. 29. 17:09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유인경이 만난 사람 - 오건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당선 이후 환경 변수가 악화돼 부득이하게 수정할 순 있지만 이건 처음부터 뜻이 없었던 것”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9월 26일 국무회의에서 65세 이상 모든 어르신들에게 월 20만원씩 지급하기로 했던 기초노령연금을 국민연금과 연계해서 소득하위 70%에 해당하는 분들에게만 차등지급한다고 밝혔다. 지난 대선에서 박 대통령이 내세웠던 핵심 공약이 후퇴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는 아니지만 “죄송한 마음”이라는 표현으로 사실상 사과했다.

약속은 깨져야 제맛이고 공약은 빈 말과 동의어라고 관대하게 해석해도, 그리고 파기가 아니라 유보나 축소라고 해도 국민들 입장에선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원칙과 신뢰의 아이콘’으로 알려져 있는 박 대통령이기에 더욱 그렇다. 불과 10개월 전에 전국에 나부끼던 ‘모든 어르신에게 기초노령연금 두 배 인상’이라는 플래카드를 보고 기꺼이 표를 던진 수많은 어르신 유권자들이 배신감을 느낄 만도 하다.

새로 바뀐 기초노령연금의 실체는 무엇이고, 그토록 원칙을 강조한 박 대통령이 못주겠다고 돌아선 저간의 사정은 뭘까. 기초연금을 비롯한 연금과 세금 전문가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오건호씨를 만나 궁금증을 풀어봤다. 각종 언론매체에서 도움말이나 인터뷰를 요청하는 전화가 끊이지 않아 인터뷰가 제대로 이어지지 못할 정도였다.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밝힌 기초노령연금안 후퇴 파장이 심하다.

“물론 대통령이나 정부의 입장도 이해한다. 약속대로 줄 돈이 없으니 속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보편적 기초노령연금의 도입은 박 대통령의 핵심 공약이었다. 노인 빈곤 문제로 힘들어 하던 국민들의 염원을 반영한 것이었는데, 보편적 기초노령연금 2배 인상 공약을 무책임하게 파기하면서 국민들의 염원을 저버리고 정치와 공약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4대 중증질환 100% 국가보장, 무상보육과 같은 박 대통령의 복지공약들이 하나같이 대폭 축소 또는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보편적 기초연금 공약마저 파기된다면 애초에 복지정책 실현의 의지가 있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정부의 앞날도 걱정된다.”

안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소득 하위 70%에 대해서는 지급한다는데.

“소득하위 70%에 대해서만, 그것도 국민연금 가입기간과 연동해 차등지급하겠다는 이 정부의 기초연금 지급방안은 OECD 1위인 우리나라 노인 빈곤 문제의 적절한 해결책이 못된다. 국민연금 성실가입자를 역차별하여 공적연금 제도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심각한 부작용까지 안고 있다. 문제는 국민연금 가입기간과 연동되어 있어 가입기간이 길수록 감액이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국민연금을 탈퇴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어 중장기적으로 국민연금의 재정에도 파장이 일 수 있다.”

일부에서는 기초연금이 세대갈등을 일으킨다고 경고하는데.

“현재 30~40대에겐 불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연금에 가입해 있는 30~40대 직장인들은 앞으로 20~30년 붓다보면 기초연금 수령액이 줄어든다. 기초연금만 놓고 보면 분명히 손해다. 거기에 대한 불만이 생길 수 있지 않겠나.”

박 대통령을 사기죄로 고소했다. 무슨 사기를 쳤나.

“올 봄에 박 대통령과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을 ‘공약사기죄’와 ‘허위사실 유포죄’로 고발했는데, 검찰에서 혐의 없음으로 파기했다. 다시 기소요구 항고장을 제출한 것도 추석 전날 기각됐다. 기초연금 공약은 기획된 사기다. 애초 줄 의도가 없었다. 황우여 대표가 ‘이번 기초연금의 핵심은 국민연금과 통합한다는 것이 핵심이다’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국민들은 ‘모든 65세 이상에게 20만원씩 준다’에 방점을 찍고 철석같이 믿었다. 돈이 필요하면 세금을 더 거두는 방안을 강구하고 노력해야 한다. 당선 이후에 환경 변수가 악화되어 부득이하게 수정할 수는 있지만, 이건 애초부터 모두에게 공평하게 줄 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누리꾼은 ‘박 대통령은 죄가 없다. (후보 연설 때) 그저 써준 대로 읽었을 뿐이다’라는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박 대통령의 무책임성을 비아냥댄 건데 팩트만 보면 그것도 맞지 않다. 대통령 선거 직전 TV 토론 동영상을 다시 보면 박 후보가 분명히 자료를 보지 않고 ‘국민연금과 연계해 20만원을 주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써준 걸 읽은 게 아니라 박 후보가 공약에 대해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공약을 추진하려다 난관에 처해 못지킨 것이 아니라 못지킬 줄 알고서도 약속하고, 그에 따라 돈을 안 주는 것이라면 명백한 사기다.”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도 사의를 표하며 “장관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란 말을 했다. 주무부처 장관도 이렇게 한계를 느낀다는데.

“복지부는 대부분 예산에 의해 집행되는 일만 한다. 규제를 풀고 늘리는 과정이 있어야 권한도 생기고 이권도 발생하는데, 복지는 그저 예산을 나눠주는 일이다. 쉽게 말하면 진 장관이 예산담당인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진 것이다. 제대로 설득해서 복지예산을 넉넉하게 따왔으면 쉽게 집행하기만 하면 된다. 복지예산은 주로 빈곤층의 기초생활복지, 의료복지, 노인과 장애인의 기초연금으로 쓰인다. 그런데 기초생활연금 및 노인복지와 관련해 시스템은 의욕적으로 개편했지만 그에 따른 예산은 별로 늘리지 않아 한계를 느껴 벌어진 것이다.”

증세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돈에 몹시 연연한다. 막장드라마나 편파방송에는 침묵하지만 수신료를 500원만 인상한다고 하면 엄청난 저항을 한다. 한 달에 몇백원에도 벌벌 떠는데 세금을 더 내라고 하면 설득력이 있나.

 

“그건 판단의 차이다. 2~3년 전만 해도 누구도 증세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첫 번째 이유는 복지 체험이 빈약하고 부족했기 때문이다. 내가 낸 세금이 결국 내게 복지혜택으로 돌아온다는 체험을 해봐야 세금을 내는 당위성을 알고 증세 논의도 유의미하게 이뤄진다.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은 후에는 보험료를 낸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무료급식, 무상보육 등 다양한 복지 체험이 자리를 잡으면 증세 논의가 당연시된다. 이제는 증세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이 비교적 줄어들었다.”

증세의 방안으로 ‘사회복지세’를 제안했다.

“조세개혁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숙제인 반면 복지 확대는 현재진행형이다. 재정을 마련하지 못해 보편복지가 시험대에 선 원인이다. 최근 복지 확대가 힘을 얻게 된 배경에는 복지재정을 늘리겠다는 ‘약속어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박근혜 정부든, 보편복지 세력이든 이 어음을 어떻게 지급할지 책임 있는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 어음의 부도를 막기 위한 방안으로 ‘복지에만 쓰는 세금’, 사회복지세 도입을 지지한다. 세금과 복지를 결합하면 지출 불신을 우회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복지증세가 효과를 발휘하리라 기대한다.”

민주당 등에서는 얼마 전 보편적 복지국가를 위한 세제개편을 놓고 ‘세금폭탄’이란 주장도 했다.

“민주당은 보편적 복지를 위해 월 1만3000원의 돈을 더 내는 것을 세금폭탄이라고 하는데, 복지정당이라고 하면서 세금과 복지를 결합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은 난센스다. 우리나라의 조세부담률은 19.8%인데 OECD 국가의 평균은 24.6%다. 국민 각자가 세금을 절대 많이 내는 편이 아니다. 그리고 박근혜 후보의 공약을 지키려면 2017년까지 30조원이 더 필요하지만 문재인 후보의 복지공약을 지키려면 55조원이 더 필요하다. 만약 문 후보가 당선되어 복지공약을 실천하려면 엄청난 증세를 통한 재정확충을 해야 한다. 상위 1%의 부자 증세만으로는 재원 확보도 안 되고 사회적 에너지도 고갈된다.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훨씬 큰 공약 파동을 겪었을 것이다. 민주당은 정책이나 언행들을 보면 집권 의지가 없는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재정난 해소방안의 하나로 지하경제 양성화를 강조한다. 가능한가.

“사실 부자들이 세금을 더 잘 안 낸다. 출처 파악도 힘들다. 한때 동해에 7광구가 있다고 온 국민들이 기대감에 부풀었다. 지하광구에서 곧 석유가 쏟아진다고 했다. 하지만 지하에 매장된 석유 역시 시추선이 있어야 파서 활용할 수 있다. 과세도 인프라가 필요하다. 지하경제는 두더지 같아서 파면 팔수록 더 밑으로 간다. 과세 인프라는 구축하는 데 시간도 걸리고 어느 정도의 금액이 거둬질 수 있을지 변수도 많다. 그래서 총 복지수요에 대한 지출계획을 제대로 세우는 복지 로드맵이 필요하다.”

보편적 복지, 보편적 복지 하는데 대체 어디까지가 보편적 복지인가.

“그 시대 사회 구성원의 요구와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엔 아이의 도시락은 당연히 엄마가 정성과 사랑을 담뿍 담아 만들었지만 현재 시행 중인 학교 무상급식은 만족도가 85%다. 시대적·사회적으로 학교에서 밥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무상보육도 재원 논란이 많지만 판정승으로 가는 추세다. 근거가 없고 불편하다면 확대되지 않을 것이다. 기초연금 역시 상위 30%에게도 줘야 하느냐고 하는데, 이건희 회장에게도 매달 20만원을 주고 대신 세금을 200만원 이상 내게 하면 되는 것이다. 취약계층만 주는 선별복지보다 전체가 동등하게 나눠야 사회적 일탈 예방효과가 크다. 보편적 복지가 강한 복지이고, 결국 강한 재정의 효과도 가져온다. 물론 보편적 복지에는 사회 구성원의 합의가 필요해서 그 길로 가려면 어려움이 크고 시간도 걸릴 것이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 - 오건호 / 이상훈 기자

복지는 당연한 국민 권리이지만 너무 무리한 혜택을 요구하는 이들도 많다. 일부 사례이긴 하나 친구들과 나이트클럽에 간다며 아이를 심야까지 유아원에 맡긴 어머니도 있고, 장 보러 가면서 장애우를 위한 자동차 서비스를 요구하기도 하고.

 

 

“모든 권리는 책임도 수반한다. 복지제도를 향유하려면 제도의 지속 가능, 서비스 담당자에 대한 존중, 비용의 자기몫 감수가 필수다. 아직 우리는 복지 초기여서 겨우 맛만 본 상태라 요구만 많고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지나 의식이 부족하다. 복지를 권리만이 아니라 책임으로 느끼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요하다. 그래야 지금 누리는 복지제도가 오래 간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곧 온다. 국가의 복지제도만이 아니라 개인의 노후준비도 달라져야 할 것 같다.

“고령화 문제는 진보·보수를 떠나 모두가 직면한 풀어야 할 역사적 과제다, 노동시장 은퇴 후의 생존시기가 늘어나면 소득행위를 하지 않고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개인이 모은 재산, 가족의 지원, 국가 지원 등 복지시스템에 대한 재구조화가 필요하다. 개인이 술·담배 실컷 마시고 피운 후에 암에 걸리면 그 비용을 국가가 모두 책임지라는 것도 모순이어서 건강의료정책 역시 예방을 강조해야 하고, 노인들이 모여 소일거리의 노동도 하고 의료혜택도 받는 지역별 마을공동체도 필요하다. 많은 연구들이 현재 증가율로 보면 2050년쯤에 국가재정이 붕괴된다는 자료를 발표하는데 그건 겁주는 거다. 상태를 방치할 경우 그렇다는 것이다. 정부와 정책이 개입해서 복지시스템을 절약형으로 바꾸면 된다. 재앙으로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끄는 단체가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인데 어떤 복지국가를 만들고 싶은가.

“대단한 이상향이 아니라 일단 스웨덴식 복지국가를 목표로 한다. 복지국가라고 해서 갈등도 없고 다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국민 각자가 정직하게 낸 돈으로 직위와 연령에 상관 없이 충분한 복지혜택을 누리기를 바란다.”

 

세금을 더 내자고 항상 주장하는데, 본인은 세금을 잘 내나.

 

연구소에서 원천징수를 해서 정확한 세금 액수는 잘 모른다. 수입이 근로소득과 원고나 강연 등의 기타 소득으로 나뉘는데, 30만원의 원고료를 받아도 24만원은 공제되고 6만원의 15%를 공제하는 것이 현행 세금제도다. 다른 나라에 비하면 참 적게 낸다. 난 지금 제도에 충실하고 투명하게 세금을 내고 있지만 더 많이 국가에서 거둬가고 더 많은 복지를 주기를 바란다.”

이런 상황에서도 새누리당은 “지난 정권 때도 공약의 반도 지키지 않았다”고 물타기하고, 야당 의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비난만 퍼붓는다. 오건호 위원장의 말에 세금을 더 내도 좋다고 생각하다가도, 내가 알토란같이 낸 세금이 저런 이들의 세비로 나간다는 걸 떠올리면 억장이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