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장발장 부자, 국가는 어디 있나

2019. 12. 18. 13:59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지난주 ‘현대판 장발장’ 제목의 뉴스가 계속 마음에 남는다. 인천의 어느 마트에서 아버지와 12세 아들이 우유와 사과 등을 훔치다 적발된 사건이다. 아버지는 너무 배고팠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당뇨와 갑상선 질병으로 6개월째 일을 하지 못했고,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돼 있었지만 홀어머니와 7세 아들까지 네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기가 무척 힘겨웠다. 아마 그는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곳조차 없다는 절박함에 마트로 향했고 아들은 애타게 먹을 것을 찾는 어린 동생을 떠올리며 아빠를 따라 나섰을 것이다. 방송은 이웃의 온정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지만 우리는 이 질문도 던져야 한다.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 

 

 

정부는 대답할 것이다. 기초생활보장 복지를 제공하였다고. 정부에 다시 묻는다. 정말 기초생활보장제도 안으로 들어오면 안전한가? 사람들이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복지 시스템을 정비하고 부양의무자 기준을 개선해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적용받도록 하겠다기에 하는 말이다. 물론 복지 행정망을 보완하고 사각지대를 줄여 비수급 빈곤층을 도와주는 대책은 시급하고 중요하다. 지금보다 더 박차를 가해야 한다. 그렇다고 현재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온전하다고 여긴다면 착오이다. 기초생활수급자의 자살률이 전체 계층 평균보다 2.1배, 최상위 계층보다 2.8배나 높은 게 우리 현실이다. 

 

 

“난 정부에 사육당하고 있어….” 어느 기초생활수급 노인의 말이다. 우리에 가둔 가축에게 딱 생존할 만큼만 먹이를 주듯이 그저 숨만 쉬고 살라는 게 기초생활보장제도라는 한탄이다. 지난주 국회에서 ‘줬다 뺏는 기초연금’ 지원 예산이 무산되자 80대 어르신이 내가만드는복지국가에 팩스로 편지를 보내왔다. “대통령님, 국회의원님, 보건복지부 장관님, 한달 51만원으로 한번 살아 보실래요?”라고 시작하는 글은 기초생활수급자들이 하루하루 식물인간으로 버텨내며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를 하소연한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정부의 눈에는 현재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무난한 듯하다. 문재인 정부 3년 동안 생계급여 평균 인상률은 2.06%로 박근혜 정부 평균 3.38%보다도 낮다. 자식에게서 얼마의 용돈을 받을 거라 가정해 수급비를 깎고 전세금까지 소득으로 잡아 공제하니 모두가 생계급여 전액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생계급여를 올리자고 제안하면 사각지대에 더 절박한 사람도 있다며 아예 말을 막는다. 포용국가를 주창하면서도 예산을 한정해 놓고 수급 빈곤층과 비수급 빈곤층을 양자택일하듯 저울질한다. 

 

 

기초생활보장법 제4조는 이렇다. “이 법에 따른 급여는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생계급여 결정에 관여하는 정부, 학자들에게 묻고 싶다. 현재 급여가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들은 사실상 법을 어기고 있는 건 아닌지. 아니 이 상태를 용인해온 우리 모두 이웃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보름 전 서울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재분배의 역설’로 유명한 학자 요아킴 팔메가 왔다. 보통 가난한 사람에게만 제공하는 선별복지가 재분배에 효과적이라고 예상하겠지만, 실제 서구 복지국가를 살펴보면 모두에게 적용하는 보편복지가 오히려 재분배를 증진했다는 그의 주장은 우리나라 보편·선별 논쟁에서 보편복지 쪽의 이론적 근거로 역할을 했다. 이번 학술대회도 거듭 보편복지의 정당성을 강조했고 그 방향을 공유하는 문재인 정부와 전문가들은 더욱 확신을 다졌을 것이다.

 

 

나도 보편주의를 지지한다. 그렇다고 모든 복지제도를 보편적으로 설계할 수는 없다. 무상급식, 아동수당 등은 대상의 범위를 두고 보편·선별 논쟁이 생기지만, 기초생활보장제도처럼 애초 가난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복지들도 있다. 보편주의가 어려운 사람을 위한 공공부조 복지의 튼튼한 토대 위에서 구현되어야 하건만 한국에선 보편 복지는 강조되지만 하위계층 복지는 자꾸만 주변화된다. 복지가 빠르게 늘고 있지만 정작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복지는 정체되는 ‘복지의 불균등 발전’이다.

 

 

무상급식 논란 이후 대한민국에서 복지바람이 분 지 10년이다. 이제 복지의 균등 발전을 모색하는 시야가 필요하다. 진보가 자부심을 갖는 건 약자의 자리에 서기 때문이다. 보편주의자라면 가난한 사람의 복지를 위해 더욱 나서라고 요청하고 싶다. 여러 불운이 겹쳤다면 마트 구석 칸에서 우유를 집어 드는 아버지가 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카뮈의 <페스트>가 말하듯이, 모두 행복을 꿈꾸지만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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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12172038045&code=990308#csidxeb9e7577af386ee87aab877f51848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