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28. 18:28ㆍ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문화와 세상]세상에서 가장 오묘한 상품
이 상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맘대로 당장 쓸 수도 없다. 아니, 억지로 쓰려면 쓸 수야 있겠지만 기분 좋은 일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꼬박꼬박 돈을 지불하며 이 상품을 사고, 하나만으로는 안되겠는지 여러 개를 구입하기도 한다. 보험 이야기다. 나는 인간이 만들어낸 상품 가운데 보험이 가장 오묘하고 신기하다고 탄복한다. 눈앞에 실체도 없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위험에 대비해야겠다고 돈을 쓰니. 이런 까닭에 보험을 꺼리는 사람이 꽤나 많다. 그러나 바라지 않는다 하여 위험이 당신만을 피해 가지는 않는다.
난 원래 근시가 심한 편이었다. 그래도 사업을 시작했던 30대 초반까지는 농구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창업한 지 얼마 뒤 고교 시절 친구가 찾아와 내 인생을 설계해준다고 들이대서 망설였는데, 1995년 당시로서는 감동할 만큼 좋은 종이에 멋진 그래프를 그려 왔기에 덜컥 그 종신보험에 가입했다. 내내 생돈 날리는 기분이었다. 외환위기 때 몇 번 해지하려다가 바빠서 기회를 놓쳤다. 그런데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내 시력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병원에서는 시각장애 5급 판정을 내렸고, 난 그때부터 지하철을 공짜로 탔다. 제법 잘 나가던 회사가 내리막길에 들어서서 정말 한 푼이 아쉽던 2005년 초에 난 장애 검사를 다시 받았다. 더 심해졌으면 보험료를 내지 않고도 보장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다.
판정 결과는 시각장애 1급. 전혀 안 보이는 건 아니지만 눈뜬장님이라는 선고였다. 보험사 기준을 넘어섰다는 성취감(?)에 의기양양하게 보험사에 전화를 했더니, 그 정도면 보험료를 면제해주는 수준이 아니라 ‘사망에 준하는 장애’라 사망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내가 보험사로부터 받은 보험금은 10년 동안 낸 보험료의 열 배가 넘었다. 물론 이 돈은 어려운 회사 사정 때문에 내 통장에 며칠 머무르지도 않았지만. 사람이면 누구나 이런 위험에 마주할 때가 있게 마련이고 자칫하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품위마저 잃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그 일년 뒤 결국 회사가 망해서 난 파산했다. 장님 알거지가 된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국민연금공단에서 연락이 왔다. 장애인이니 12년 동안 낸 국민연금 기준에 맞는 장애연금을 탈 수 있다는, 정말 생각지도 않던 낭보였다. 보험 수혜자에서 복지 수혜자로 바뀌어 난 그 연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며 당장은 돈도 안되는 작가로 인생의 2막을 열고 있다. 급하게 재기해야 할 이유가 옅으니 남들이 하기 어려운 작업에도 과감하게 도전하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복지는 국가가 사회 전 성원을 위해 운영하는 보험이다. 건강 말고도 우리는 실직, 파산, 그리고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나이의 위험 앞에 노출돼 있다. 걱정의 뿌리는 나에게 위험이 닥쳐온 뒤 내 가족이 겪을 고통, 미래의 고통이다. 재산이 있는 사람이야 걱정이 덜하겠지만, 그 후대가 재산을 한방에 날리는 일도 허다하다. 그래서 보험을 들어놓는다. 가장 확실한 보험은 학벌이라고 여겨 사교육비 지출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나이가 차면 차별 없이 투표권을 얻는다. 그처럼 당신이 매달 50만원 정도의 최저생계 수당을 천부인권으로 보장받는다면 갑자기 일자리를 잃거나 병이 들더라도 그 걱정의 크기가 지금과 같을까? 월 50만원에 만족할 사람은 드무니 도덕적 해이를 들먹일 필요는 없다. 이런 가정은 먼 미래의 일이라 치더라도 당장 건강보험료를 월 2만원만 더 내면 10만원짜리 민간보험을 부을 이유가 없다. ‘세금’이라는 보험료를 더 내면 실직이나 파산, 노후의 두려움이 왕창 줄어들고 우리는 문명인으로 살 수 있다. 복지는 개인의 보험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그 효능이 오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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