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문화와 세상] 악당은 인질극을 좋아한다

2013. 1. 7. 17:21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이건범 | 작가 ,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

<수퍼맨> <다이 하드> 등의 활극 영화나 범죄 드라마를 보면 늘 빠지지 않고 나오는 장면. 바로 인질극이다. 화면 속 인질극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선의와 사랑으로 연결된 사람들의 연결고리를 활용한다. 이런 경우 인질은 1차 인질로 끝나지 않고 이에 엮이는 2차 인질이 주인공을 엮는 식이다. 아이를 인질로 잡으면 그 엄마의 눈물이 주인공인 남편의 발목을 잡는다. 둘째, 인질극은 처음부터 등장하지 않고, 악당이 주인공을 이기지 못하다가 막판에 내는 계책이다. 마지막으로, 인질극은 대개 항복하려는 주인공을 향해 악당을 물리치라고 인질들이 절규하는 과정에서 해결된다.

작가가 인질극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성으로 판단할 때 가장 치사하고 졸렬한 방법, 정면으로 승부하는 떳떳함과는 상반된 악마적 방법이기 때문에 보는 이들의 분노를 자아내기 편해서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주인공은 슈퍼맨도 아니고, 정의의 승리로 마무리를 준비하는 감독도 없다. 영화나 드라마의 문법과 달리 현실의 인질극에서 주인공은 인질의 희생을 감내하더라도 자신의 길을 가야만 악당에게 지지 않는다. 참 고약하다.

 

내가 대학생이던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공무원 자녀들이 시위나 반정부 운동에 엮이면 그 부모가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 부모를 인질로 잡는 일종의 인질극이었다. 지금 교육과학기술부가 이런 인질극을 벌이고 있다.

2012년 초에 교과부는 학교폭력의 대책으로 가해자의 폭력 기록을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하여 5년 동안 유지하고 이를 진학이나 취업 등에 반영함으로써 불이익을 준다는 방침을 세웠다. 장발장에게 은촛대 대신 주홍글씨를 새겨주자는 뜻이다. 어른이라면 폭력배든 술이 약한 사람이든 상관 없이 술에 취해 문제를 일으킨 자를 처벌한 뒤 5년 동안 취직, 승진, 임금 인상, 결혼 등에 이 기록을 제출해야 한다는 이중처벌 규정이라고 이해하면 맞다. 이조차도 법률이 아닌 일개 훈령으로 기본권을 제약하는 몰상식이라 당장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동을 걸었다. 경기도 김상곤 교육감을 비롯해 전라북도와 강원도의 교육감들은 이 훈령에 반대하며 지침을 현실적으로 개선할 것을 요구하고 학생부 기재를 보류하였다.

그러나 교과부에서는 이미 1차 인질을 잡고 있었다. 고3 학생들의 학교폭력 학생부 기록을 반드시 입시에 반영하라고 각 대학에 강압을 넣은 것이다. 3개 교육청에서 기재를 보류하자 교과부는 1차 인질을 볼모로 다시 2차 인질을 잡는다. 학교폭력 기록의 학생부 기재를 보류한 3개 교육청을 대상으로 감사를 실시하여 교육청 고위 간부와 교육장, 교장 등 전국 220명에게 징계를 내리라고 요구한 것이다.

경기도의 교육장 25명 전원은 교과부 처사가 잘못되었다는 호소문까지 냈다. 이에 교과부 장관은 교육장들과 교육청 핵심 간부들을 직권으로 특별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특별징계위원회는 교육감의 요청에 의해서만 열리는 것인데, 교육감들이 이를 요청하지 않으니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다. 김상곤 교육감 등이 이런 징계 방침에 반발하자 교과부는 교육감을 고발하고 수사를 의뢰했다. 내가 알기로 김상곤 교육감은 교과부로부터 세 번째 고발을 당하는 건데, 두 번 모두 교과부가 졌었다. 역시 인질극은 막판에 내는 계책이다. 원래 악당은 이렇게 해야 제대로 악당 맛이 난다.

분명 특별징계에 몰린 그들 가운데에는 정년퇴임을 앞둔 이도 있으리라. 교육자치와 인권을 위해 애써온 ‘천상 교육자’들이 불명예스럽게 잘릴지도 모르는 이 인질극 앞에서 주인공의 고뇌는 얼마나 깊을까. 영화보다 더 치밀한 이 인질극을 보노라면 박근혜 당선인이 외치던 ‘통합’의 실체가 더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