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세금, 무서워할 일이 아니다

2012. 10. 18. 21:59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경향논단] 세금, 무서워할 일이 아니다


오건호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연구실장

 

 


 

그제 중앙일보가 사설을 통해 복지 후보라면 ‘보편적 증세방안’을 내놓으라고 주문했다. 새누리당에서도 증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책임 있는 재정대책이 필요하다는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우지만, 야권후보들에게 세금이 아킬레스건이라 판단했을 게다. 그래서 피해야 할까? 아니다. 이제 세금에 대해 정면으로 응시할 때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세금은 권위주의 정권과 동일시되는 억압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과세 형평성 문제가 남아 있어 불편한 대상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새로운 인식도 싹트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살 세상은 복지국가였으면 좋겠는데 이를 위해선 세금이 늘 수밖에 없으므로 형편껏 세금을 내야 한다는 생각이다.


얼마 전 경향신문 창간 66주년 여론조사에서도 “복지 확대를 위해 세금을 더 부담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55.2%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실제 자신이 세금을 낼 때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증세에 대한 당위적 찬반이 아니라 더 낼 용의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정치권의 판단과 달리 시민들의 세금 생각에 의미 있는 변화가 생기고 있다.

정작 보편 복지를 주창하는 정당이나 시민단체가 지나치게 조세 저항에 민감하여 이 변화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론에 의해 제공되는 자극적인 기사들에 무기력하게 구속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시민들 역시 초·중·고, 대학을 통틀어 세금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전무하다. 누진 구간을 가진 소득세 체계에서 자신의 세금이 어떻게 계산되는지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을 듯싶다.

지난달 정부가 내년 세입 예산안을 발표하자 언론은 일제히 ‘1인당 세금부담 550만원, 올해보다 32만원 더 내’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세입의 절반을 차지하는 직접세가 누진적이고, 간접세조차도 소비가 많은 상위계층 납부액이 많다는 점을 무시한 계산법이다. 한 보수언론은 우리나라 복지지출을 OECD 수준으로 올리자는 주장에 대해 추가로 필요한 돈을 인구수로 나누니 1인당 250만원이라며 이를 국민들이 수용하겠느냐고 비판한다. 이 역시 보편 복지는 동일하게 제공되지만 보편 증세는 소득에 따라 누진적으로 부과된다는 원리에 어긋난 셈법이다. 소득세만 보면, 전체 세입의 95%를 상위 20%가 내고 있다. 대신 중간계층인 4인 가구 월 300만원 소득자가 내는 근로소득세는 월 3만원, 월급의 1% 수준이다. 전체 근로자의 40%에 이르는 월 200만원 미만 소득자는 다음해에 돌려받는 연말정산액을 감안하면 거의가 면세자에 속하는 게 현실이다.

우리나라 과세 정의가 괜찮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필요 이상으로 조세 저항을 부추겨 왔고, 그것이 심각한 보수적 효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세력이 툭하면 던지는 게 세금폭탄론이다. 마치 서민들의 세금 부담을 걱정해주는 듯하지만 본심은 부자 세금을 회피하기 위한 카드이다. 직접세 체계에서 증세는 대부분 상위계층 몫임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이다.

변화하는 민심을 주목하자. 과거에는 세금이 형평에 맞지 못한 부정의의 표상, 이것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미래 복지국가의 토대라는 또 하나의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저항과 건설이라는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한다. 시민들의 이 복잡한 마음을 속시원히 내보이게 하는 전향적인 세금 정치가 요청된다.

시민들이 지닌 조세정의감을 과거식의 세금폭탄론에 가두지 말고 미래지향적인 에너지로 삼자. 대한민국 복지국가 건설에 시민들이 책임 있는 참여자로 나서게 하자. 형편껏 세금을 내자고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세금만 더 내자는 게 아니다. 그 열정이 있어야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을 짓눌러 왔던 후진적 재정지출, 과세인프라를 혁신하는 힘도 만들어질 수 있고, 집권했을 때 복지공약도 실행가능하다.

보편 증세 방안을 내놓으라고? 그래야 한다. 보수에게 보편 증세 이야기가 부자증세를 회피하려는 꼼수라면, 진보에겐 대한민국의 나라살림 구조를 개조하는 혁신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