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경제와 세상] 살리는 정부와 죽이는 정부

2012. 10. 4. 13:18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경제와 세상]살리는 정부와 죽이는 정부

김영순 | 서울과기대 기초교육학부 교수

 

아니나 다를까. 추석 연휴 끝에 배달된 조간신문은 자살과 묻지마 살인, 폭력 얘기로 얼룩져 있다. 행복해야 할 명절이 누군가에겐 죽고 싶고 죽이고 싶을 만큼 자신의 불행을 더 선명히 하는 날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만연한 자살과 살인이 어제오늘 얘기는 아니다. 여름 내내 우리는 끔찍한 살인 사건 보도를 보아왔다. 지난달 10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1년 정신건강 실태조사’에 의하면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했다. 8년째 부동의 1위다. 매일 42.6명, 한 해 1만556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런 우울한 소식들은 어쩔 수 없이 살인과 자살이 동전의 양면임을 지적했던 제임스 길리건의 보고서를 떠올리게 한다.

34년 동안 하버드의대 교수를 지냈고, 지금은 뉴욕대 교수로 있는 길리건은 그의 책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에서 자살과 살인이 동반상승하거나 동반하락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집권정당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에서 1900년 이래 일관되게 자살과 살인(그는 이 둘을 합쳐 ‘치사적 폭력’이라고 부른다)이 전염병 수준으로 증대한 것은 매번 공화당 정부 하에서였고, 보통수준으로 낮아진 것은 늘 민주당 정부 하에서였다. 이 도발적 관찰결과에 스스로 놀란 그는 여러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통계수치들을 이렇게도 잘라보고 저렇게도 썰어보며 정권과 치사적 폭력 사이의 관계를 검증해 보았다. 그러나 결론은 같았다. 공화당 정권의 출현은 치사적 폭력 증대의 필요조건이었다.

왜 공화당 정부가 자살률과 살인율을 높이나? 공화당 정치인들이 원래 나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정책이 죽음을 불러오기 때문이라는 것이 길리건의 주장이다. 경쟁을 부추기고 실업과 상대적 빈곤, 불평등을 가져오는 공화당의 경제정책은 패배자들을 양산할 뿐만 아니라, 패배의 원인을 개인의 무능으로 돌림으로써 패배자들에게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을 안겨준다. 수치심으로 고통스러울 때 사람들은 자기 안의 수치심을 떠넘기기 위해 남을 살해하거나, 자신을 살해한다. 자살과 살인이 동전의 양면인 이유이다. 반면 빈곤과 불평등의 사회적 원인에 주목하고 그것을 완화하는 민주당의 정책들은 자살률과 살인율을 낮춘다. 결국 정치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것이다.

일각에선 길리건의 주장, 특히 ‘정권효과’가 우리 현실엔 잘 맞지 않는 얘기란 지적도 나온다. 한국에서 자살률, 살인율은 정권과 무관하게 계속 증대해왔다는 것이다. 미국과 다른 우리의 특징들, 즉 짧은 통계 축적기간, 과거 자살률 집계의 부정확성, 집권정당에 따른 정책차이를 논하기엔 민주화 이후 정권교대 경험이 너무 일천하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한국에서 정부 정책과 치사적 폭력 간의 상관관계가 약하게 나타나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사회경제정책들이 양극화를 막지 못했고 오히려 심화시키기까지 했다는 점도 치사적 폭력에 미치는 정권효과를 약화시킨 요인일 것이다.

그러나 소득불평등과 치사적 폭력 사이의 밀접한 관계만은 이미 우리 사회의 보수적 기관들조차도 인정하고 있는 바다. 지난 1월 한국은행이 발표한 ‘한국의 경제성장과 사회지표의 변화’ 보고서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소득불평등과 양극화는 심화됐고 같은 기간 살인과 자살도 급증했다. 소득불균등이 확대되면 상대적인 박탈감이 커지고, 그로 인해 범죄율이나 자살률이 높아지며, 이를 완화하기 위해 교육과 복지, 부동산, 세제 등의 정책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 보고서의 제안이었다.

비정치적 의사로서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시작해 가장 정치적 결론에 도달한 길리건의 최종적 주장은, 정치가 그리고 정부를 선출하는 한 표 한 표가 삶과 죽음을 가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두 달 반 후, 다시 5년을 좌우할 투표를 하게 된다. 우리는 생명을 구하는 정부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