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논단] 보편복지 논의의 사각지대
2012. 9. 23. 21:36ㆍ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최근 서울에서 영구임대아파트 주민이 연이어 자살했다는 보도로 마음이 무겁다. 마을공동체운동을 하는 지인에게 물어보니 지방도 상황이 비슷하단다. 몇 년간 복지 바람이 불었는데도 이들에겐 그늘이 너무 깊다. 대선이 코앞인데 복지 의제도 좀처럼 뜨지 않는다. 새누리당이든 야당이든 지금 정도로 복지 논의를 마무리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든다. 작년까지만 해도 총선, 대선이 있는 올해는 복지 태풍이 불 줄 알았는데. 어디서 어긋났을까?
지난 3년간 보편·선별 복지논쟁이 있었다. 대한민국을 지배했던 선별복지 담론을 깨는 중요한 일이었다. 이제 복지는 모두가 누려야 할 권리라는 생각이 자리잡아 가고 있다. 우리 사회가 복지국가로 가는데 반드시 거쳐야 할 장벽을 넘는 중이다. 그런데 한계도 남겼다. 어려운 서민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정치권이 복지 의제를 가볍게 여기고 있다면 무언가 공백이 있었던 게다. 바로 복지 주체다. 복지 담론은 확산됐지만 복지 주체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 복지를 자신의 과제로 절실하게 내거는 세력이 있는가? 정치권의 립서비스를 통렬히 비판하는 목소리가 어디 있는가? 전통적 복지세력이라는 진보정당, 노동조합의 책임이 크다. 복지가 절박한 당사자들이 복지 논의에서 배제돼 왔다.
우선 취약계층과 사회복지사들이 그렇다. 이들을 위한 공공부조와 전달체계를 튼튼히 갖추는 일은 보편복지 논의의 기본 토대이다. 그런데 보편·선별 복지논쟁이 선악 이분법으로 읽히면서 본래 선별복지 특성을 지닌 취약계층 복지가 무시됐다. 2009년 7조9800억원이었던 국민기초생활보장 예산은 올해 7조9100억원으로 오히려 절대금액이 줄었다. 이명박 정부 임기 5년 동안 장애인예산 평균증가율은 6.6%로 복지지출 평균증가율 7.7%에도 못미친다. 복지 논쟁이 뜨거웠건만 이들에게 불어간 건 찬바람이었다.
취약계층 복지의 주변화는 핵심 복지주체들을 논의에서 밀어내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나라는 사회복지 전달체계가 나름 갖추어져 있어, 사회복지사 자격을 가진 사람만 53만명이다. 국민 100명당 1명이고 이 중 상당수가 직접 복지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이 복지 논의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자신이 일하는 복지현장에서 접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의료급여제도, 저소득층 아동과 노인 돌봄서비스 등 빈약한 현실을 개탄할 뿐이었다. 이들이 만나는 수백만 명의 취약계층 역시 복지 논의에 참여할 동기를 발견할 수 없었다. 복지 열풍이 불고 있다는 대한민국이 그들에게는 멀리 있는 다른 나라였다.
사회보험 사각지대도 방치됐다. 복지체계에서 보편복지 원리가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은 사회서비스와 사회보험인데, 사회서비스의 보편복지화 논의는 급식, 보육에서 만개했지만 사회보험은 논의 테이블에 올라가지도 못했다. 사회서비스 영역에서 보편복지 적용 여부를 둘러싼 대상이 상위계층인 반면 사회보험이 포괄하지 못하는 사각지대는 불안정 노동자들이다. 노동시장에서 어려운 노동자일수록 사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역진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건만 보편복지 논쟁에서 이들의 복지는 다루어지지 않았다. 노동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풀어야 하기에 당장 근본적 해법이 어렵다면 우선 이들을 사회보험 제도 내부로 편입시키기 위한 사회보험료 지원이 필수적임에도 말이다. 결국 불안정노동자 역시 보편복지 논의에 귀기울이기 어려웠다.
지난 3년 보편복지 논쟁이 얻은 성과는 중요하다. 선별복지 인식틀을 전환하는 역사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럼에도 취약계층 복지, 사회보험 사각지대가 잊혀짐으로써 복지 현장의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사회복지사와 복지당사자, 한국사회 모순을 몸으로 담고 있는 불안정노동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복지 담론은 만개하건만 침묵해야 했다. 그 결과 조그만 의지처도 얻지 못해 사람들이 목숨을 끊고, 불안정한 노동자일수록 사회보험 밖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 보편복지 논의가 놓친 사각지대를 주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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