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거리의 간판에 한글이 숨쉬게 하자

2014. 10. 11. 19:50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_ 이건범 작가,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어려운 말 때문에 빚어질 차별을 막기 위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쉬운 공공언어를 사용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2013년 10월 초에 국무회의에서 쉬운 공공언어를 사용하자는 논의가 있고 나서 올 3월 44개 ‘정부부처청 대변인협의회’에서는 쉬운 공공언어 쓰기 결의대회를 열어 쉬운 공공언어가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는 바탕임을 밝혔다. 이에 정부부처의 보도자료 견본을 뽑아 꾸준히 평가하는 일도 진행 중이다.


 

서울시도 지난 6월 말에 국어사용조례를 제정하여 7월17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경기도의회에서도 지난주에 국어사용조례가 통과되었다. 지자체의 국어사용조례는 국어기본법에서 규정한 공문서의 한글 전용 표기 원칙뿐만 아니라 어떤 낱말을 사용할 것인가로까지 한걸음 더 나아갔다. 서울시 조례에서는 시민이 일상생활에서 널리 쓰는 말을 주로 사용하고, 저속하거나 차별적인 말과 외국어 및 신조어 사용을 피한다는 규정까지 만들었다.

공문서에서 아직도 국어기본법을 위반하면서 한글 대신 외국문자, 특히 로마자로 적는 낱말이 많다. risk, kick-off 등 우리말과 한글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말들을 그렇게 적고 있다. 하루빨리 고쳐야 한다. 더 나아가, 비록 한글로 적었다고는 하나 외국어 낱말을 음만 따서 한글로 적는 버릇을 고쳐야 한다. 구덩이나 땅꺼짐으로 표현할 말을 굳이 ‘싱크 홀’이라고 사용해 혼란을 부르지 않는가? 서울 지하철 5~8호선에서 스크린 도어를 ‘안전문’으로 고쳤듯이 국민의 안전과 알 권리에 도움되는 쪽으로 고쳐야 한다. 그 다음으로 이상한 외국어 신조어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쿨비즈와 같은 국적 불명의 신조어인데, 서울시는 이것을 시원차림으로 바꿨다.

국어문화를 발전시키는 일은 단지 한국어와 한글이 우리 것이라서만이 아니다. 언어 사용의 측면에서 국민의 평등권과 알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공동체 정신을 키우는 일이다. 언어공동체의 발전이야말로 인권공동체, 정치공동체를 발전시키는 토대다. 나는 공공분야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면서 이제는 민간에서도 언어문화를 바꿔보자고 제안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거리의 간판부터 손질하자. 간판은 우리 국민의 눈에 가장 많이 띄는 문자 정보이자 도시의 미관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다. 외국인이 봤을 때 우리 문화의 특징 같은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세 업종에서는 한글로 적은 간판이 많지만 사람들이 자주 찾는 편의점과 빵집, 커피집, 술집 등의 간판에는 로마자가 압도적으로 많고,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다. 더구나 이들 간판은 돋보여서 우리네 거리 풍경을 결정짓는다.

프랑스에서는 공공게시물뿐만 아니라 상업 간판에 대해서도 프랑스어 사용을 규정하는 법이 있다. 간판은 반드시 프랑스어로 적어야 하고, 외국어를 함께 적을 경우에도 프랑스어보다 돋보여서는 안된다는 규정이다. 외국문자라 해도 프랑스에서는 대개 로마자겠지만, 우리는 한글과 로마자의 모양 차이가 크기 때문에 문제가 몹시 심각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구체적인 법규정이 없다.

민간의 상업 게시물에 왜 참견하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이상한 간판을 만들어서라도 튀어 보여 장사 좀 해보자고 변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리 간판에서 한글이 설 자리가 좁아지면 우리의 국어 감수성이 무뎌진다. 이는 시각에서 다시 청각으로 옮아가 외국어 낱말을 마구 사용하는 경향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언어문화를 뒤죽박죽으로 만들 위험이 크다. 그 모든 재앙은 외국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교육부가 초등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는 방침을 검토하는 일도 마찬가지의 재앙으로 돌아올 것이다. 1980년대 말부터 국민이 주도해 한자를 버리고 이룩한 문자혁명의 성과를 깔아뭉개는 짓이다. 그렇게 우리가 외국어, 외국문자에 쏠리면 우리말과 한글이 우스워지고, 이는 문화 생산의 장벽이 되고 만다. 568돌 한글날을 맞으며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정신을 되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