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만복 칼럼] "사회복지사는 기술만 익혀라? 복지 '정책'도 논해야"

2012. 7. 18. 21:45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내만복 칼럼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예비 사회복지사가 말하는 복지국가




고은정 사회복지사 사회복지학과 박사과정 학생



나는 지금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다. 사회복지학과는 복지국가를 드러내놓고 공부하는 몇 안 되는 전공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떠한 복지를, 누구에게, 어느 정도로 제공할지를 연구하고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배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 수만 53만 명이다. 실제로 복지를 전달하는 단계에 서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사회복지사로서, 복지의사각지대가 어디인지,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만큼 대한민국 복지국가 건설과정에서 사회복지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반갑게도 복지국가를 논의하는 자리에 참여하는 사회복지사들이 늘어나고 있고, 여러 모임도 만들어지고 있다.

예비 사회복지사, 복지국가 논의를 구경만 하라고?

하지만 복지국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사회복지계 역시 복지국가를 만들어갈 주체를 논의하면서 현재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은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다.

졸업 이후 복지국가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라고? 사회복지사가 되고난 후에야 너희들이 복지국가의 주체이며 복지국가 논의에 앞장서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혹하고, 늦은 이야기다. 사회복지 자격증이 주어지는 순간 갑자기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며, 복지국가의 주체로서 의무감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배우는 과정에서부터 복지국가의 주체로서 자신을 생각해야 한다. 생각한다고 바로 변하는 것도 아니며, 그것이 체화되는 데까지는 시간이 상당히 걸리기 때문이다.

예비 사회복지사들에게 너희들은 왜 복지국가를 적극적으로 논의하는 데 관심이 없냐고 묻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의 관심 부족을 탓하기에 앞서 현재의 사회복지 전공과정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난 항상 의문을 지녀 왔다. 현재 사회복지학 교과과정에서, 사회복지 실천과 사회복지 정책을 연결하는 고리가 약하지 않은가? 사회복지 정책, 즉 거시적인 복지국가, 복지정책에 대한 교육 비중이 너무 적은 것은 아닌가?

어떠한 국가에서 살고 싶은가?

어린 시절 우리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도록 요구받아왔다. 흐릿한 기억에 의하면 '국기에 대한 맹세 외우기'는 숙제였고, 돌아가면서 암기한 것을 검사받았던 것 같다. 지금도 나는 국가에 충성을 다짐하겠다는 구절들을 명확하게 외우고 있다. 돌아보니 참으로 이상하다. 그 어린 시절부터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국가에 충성을 다짐하겠다고 맹세까지 했는데, 누구도 나에게 국가로부터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어본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국가'의 사전적인 의미는 '일정한 영토와 거기에 사는 사람들로 구성되고, 주권(主權)에 의해 하나의 통치조직을 가지고 있는 사회집단'이다. 이 설명만으론 지리적인 경계선 외에, '국가'는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존재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국가에 대해 특별한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삶인 것 같다.

오히려 국가에 대해서 생각하기에 우리의 삶은 너무도 여유가 없다. 이기기 위한 공부, 살아남기 위한 취업 등 늘 경쟁에 내몰려 있는 상황에서 내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든 세상이 아닌가. 그러다보니 함께 잘 살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는 어떠한 국가에서 살고 싶은지 조차 진지하게 되돌아볼 겨를이 없다.

생각할수록 억울해진다. 내가 태어난 국가는 선택할 수 없다 하더라도, 충성을 다짐해가면서 살아가는 국가가 어떠한 국가였으면 좋겠는지는 국민들이 토론하고 선택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에 지난해부터 정치계를 비롯하여 연일 언론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복지국가'라는 단어를 주목한다. 복지국가는, '국가' 앞에 다른 수식어를 붙임으로써 그동안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국가'의 역할을 대중적으로 드러내준다. 그래서 반가웠다. '어떠한 국가에서 살고 싶어?' 라든가 '국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받아본 기분이다. 어쩌면 나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논의를 보고 들으면서 국가 앞에 '복지'라는 단어가 붙는 것이 적절한지, 그게 우리가 바라는 국가인지, 그럼 그 '복지'가 어떤 것인지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고민이 진지하게 시작되기도 전에, 복지국가가 추상적인 지향점을 나타나는 구호로, 대선을 앞두고 각 정당의 선전 문구로만 단기적으로 사용되고 버려지진 않을까 걱정이 된다. 물론 아이들의 보육과 급식에서 일정한 성과도 있었지만, 복지는 여전히 재원과 추진 의지 등의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으며, 복지국가를 향한 종합적 프로그램은 제자리걸음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 답답하다. 누구랑,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더 모르겠는 것이 지금의 심정이다.

복지국가 여백, 어떻게 그릴까?

'복지'와 '국가'라는 단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복지국가'라는 개념은 국가의 가장 핵심적인 사명으로 '복지'를 강조한다. '복지국가'를 이야기 할 때 스웨덴을 비롯하여 덴마크, 핀란드 등 북구 국가들과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유명한 영국 등이 언급된다.이름만큼 각 국가에서 제공되는 의료, 주거, 교육은 물론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대상, 방식, 수준 등에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선별적 복지, 맞춤형 복지, 한국형 복지 등 여러 형용사가 복지국가 앞에 붙는다.

이처럼 복지국가가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복지국가라는 도화지 위에 우리가 채워갈 수 있는 여백이 놓여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동일한 밑그림이 제시된 색칠공부도 칠하기에 따라, 배경을 꾸미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복지국가 논의에서도 누군가가 복지국가의 전반적인 그림을 제대로 그려야 한다. 이 과제를 푸는 데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참여할 것인가? 나는 국가의 주요 결정을 하도록 뽑아둔 일부의 사람들, 즉 행정권력과 의회권력에게 모든 여백을 맡길 필요는 없으며,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정책 결정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바로 우리가 그 여백을 채우는 데 함께 나서야 한다. 이러할 때만이 복지국가는 단순한 구호를 넘어 색을 입고 여백이 채워질 것이다.

나도 저 논의에 적극적으로 끼어들고 싶다. 어떤 색을 칠하고 배경을 어떻게 꾸밀지 이야기 하고 싶다. 적어도 내가 충성을 맹세했던 국가가 내가 바라는 모습을 갖추었으면 좋겠고, 그래서 나와 내 가족을 비롯해서 이웃들이 살아갈 미래가 지금보다는 행복했으면 싶다. 그럼 나는 누구와 함께, 어떤 모양으로 끼어들 수 있을까?

사회복지학 교육과정, 정책과 실천의 괴리 극복해야

▲ 사회복지학 학생들이 접하는 교육은 직접적인 실천 혹은 기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복지정책과 이를 둘러싼 정치사회적 맥락은 함께 논의되지 못한다. 사진은 장애인 가정을 찾아 집수리와 청소를 하는 사회복지사와 봉사자들. ⓒ연합뉴스
난 지금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다. 그래서 내가 세상과 맞닿아 있는 지점, 바로 대학원 과정이 지금의 질문을 풀어갈 수 있는 출발점이다. 현재 사회복지학 학생들이 접하는 교육은 클라이언트를 중심으로 한 직접적인 실천영역과 그 안에서 필요로 하는기술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큼이나 중요한 영역인, 복지 정책과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정치사회적 맥락이 함께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복지국가 이론과 정책을 다루지만 실제 한국적 현장의 문제의식과는 거리가 존재한다.

그러기에 학생들이 미래의 전문가로서 실천기술을 익히고, 복지국가에 관한 이론은 배우지만 실천영역과 정책영역의 연결고리를 체득하기 어렵다. 실천과 정책으로 분리된 세부 전공은 그 분야에서 전문성을 기를 수는 있지만 커다란 그림을 그려내는 데 한계가 있다. 게다가 자격증 취득 위주의 공부도 파편적인 지식을 암기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점을 관리해야 하는 학생이 굳이 실천과 정책을 넘나들며 타 전공격인 수업을 듣는 건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이다. 두 영역의 연결고리를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복지국가, 복지정책을 다루는 거시적인 복지 영역의 교육 비중이 학부과정에서 너무 작다. 이는 처음 사회복지를 공부하고자 마음먹은 학생들이 지녔던 동기들을 거시적이고 종합적으로 발전시킬 기회를 봉쇄하며, 사회복지 실천을 개인과 지역사회의 수준으로 한정짓는 경향을 만들어 낸다. 그 결과 학생들에게도 정책 연구기관, 국회 등은 자신이 취업할 수 있는 곳으로 고려되지 않는 듯하다.

현재의 교과과정이 개인과 집단이라는 실천영역에 치우쳐 있다면, 이제부터는 두 영역의 연결고리를 강화하는 균형적인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복지정책 현장에서 일하는 선배들이 후배 학생들에게 이론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전달하는 복지정책 실습과정을 통해 예비 사회복지사들이 사회복지 정책 형성의 주체로서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복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사회복지사들의 역할이 매우 크다면, 이제는 예비 사회복지사들이 학생 시절부터 사회복지를 통해서 자신이 만들고 싶은 세상, 즉 복지국가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는 장이 필요하다. 교수강사, 실습 수퍼바이저와 같이 예비 사회복지사들을 이끌어주는 사람들도 전문적인 지식 전달뿐만 아니라 거시적이고 정책적이며, 나아가 정치적인 맥락까지 후배들에게 던져주고 토론을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 대학생들이 처한 현실을 되돌아본다. 학창 시절 내내 등록금 준비에, 취업 스펙 쌓기에 몰두하다 보면 사회복지를 시작하게 된 동기를 잊기 쉽다. 사회복지 공부가 졸업과 자격증 취득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는 순간, 사회복지의 가치는 퇴색하기 마련이다. 서비스를 잘 전달하는 전문가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왜 그러한 서비스가 필요하고 그것이 복지 전문가에 의해 어떻게 전달되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사장되어 버린다.

쉬지 말고 우리에게 물어봐주어야 한다. 왜 사회복지를 시작했냐고. 그것을 위해서 너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며, 국가가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학교 교육과정뿐만 아니라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다듬으며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자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예비 사회복지사들의 발칙한 상상력, 기대하시라

나부터 적극적으로 나서겠다. 내가 원하는 세상에 대한 생각들, 현재 복지국가 논의에 대한 답답함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다. 그래서 나는 소통의 공간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으며, 학교 안에서 작지만 복지국가 관련 책을 읽거나 수다를 떠는 모임을 구상하고 있다. 당장 현장에 발을 딛고 있지 않더라도, 이렇게 시작하는 구체적인 발버둥들이 나와 내 친구들의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라 기대한다. 이러한 작은 모임이 국가에 충성을 다짐하는 수동적인 국민이 아니라 국가의 역할을 요구하는 능동적인 국민을 만들어가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사회복지학과 학생, 예비 사회복지사들이다. 아직 사회에 진출하지 않았다고, 복지에 관한 전문가가 아니라고 무시해 버리기엔 예비 사회복지사들이 지닌 잠재성이 너무 크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정책과 정당을 선택해 본 경험이 있으며, 자신이 바라는 사회에 대해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주체들이다. 누가 아는가? 우리가 틀에 박히지 않는 발칙한 상상력으로 복지국가의 논의에 생동감을 불어넣어줄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