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모든 표에는 생명이 있다

2022. 3. 3. 16:03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이번 대선이 신나지 않는다. 정권 사수 혹은 교체가 간절한 분들도 많지만, 나와 비슷한 심정인 사람들도 흔히 본다. 민주공화국 시민으로 투표를 당연한 의무로 생각하면서도 이번만은 투표하기가 싫단다. 비호감 후보들을 두고 차악을 뽑아야 하는 ‘강요된 투표’가 민주주의인지 의문까지 제기한다. 단지 인물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다. 이번 선거에서 복지 발전의 계기를 기대했던 시민단체 활동가로서 복지공약에서도 실망이 크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

2012년 대선에서는 신이 났다. 당시 무상급식 논란으로 타오른 복지 논쟁은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보육과 반값등록금(3무1반)을 엮어서 보편복지 담론을 만들었고 박근혜 후보조차 아버지의 꿈이었다며 복지국가를 내걸었다. 시민들은 서구 나라 이야기로만 여겼던 복지국가를 한국에서도 그려볼 수 있었다.

2017년 대선은 과거와 다른 대한민국을 꿈꾸게 하였다. 문재인 후보는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자며 투표로 촛불혁명을 완성해달라고 요청했다. 거리의 승리를 경험한 시민들은 대한민국이 건국할 때 이루지 못했던 기득권 적폐를 청산하는 감격으로 투표장에 나갔다. 모처럼 세상의 주인이 되었다.

 

사실 1년 전만 해도 이번 대선에서 또 하나의 도약을 생각했다. 코로나19를 맞아 한국 사회의 불평등이 최대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복지정책 경쟁이 뜨거우리라고 예상했다. 전 국민 고용보험, 실시간 소득 파악 등 혁신 의제가 등장했고 이재명 후보는 기본소득을 주창하며 소득보장의 지각변동을 예고했다. 그러나 정작 대선장이 열리자 선두를 다투는 두 후보 사이 논쟁을 찾아볼 수 없다. 기본소득은 공약 여부가 애매하다가 공약집에 임기말 연 100만원으로 담겼으나 이마저도 이 후보는 지난주 유세에서 “재정상의 부담이 있어 조금 미뤄 하겠다”로 후퇴하였다. 윤석열 후부는 경쟁 후보의 핵심 공약이 오락가락해도 대응하지 않는다. 자신에겐 소득불평등을 해소할 묵직한 공약이 아예 없으니 말이다.

 

연금개혁도 두 후보에겐 과제가 아닌 모양이다. 두 후보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연금개혁 내용을 차기 정부 ‘연금개혁위원회 운영’으로 미루었다. 사실 이러한 공약이 없더라도 국민연금법에 따라 5차 재정계산해인 내년에 정부는 개혁안을 국회에 제출해야 하고 보통 사회적 논의기구도 만들어진다. 구체적 연금개혁 방안이 들어가야 할 자리를 있으나마나한 문구로 때운 것이다.

 

부동산 공약은 참담하다.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눈앞이 깜깜한 사람은 국민 절반의 세입자들이다. 당장 올해 7월 계약갱신권이 종료되는 사람들은 벌써부터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런데도 두 후보는 부동산 자산가격이 올라간 집소유자의 세금 부담을 걱정한다. “여러분, 집값이 갑자기 올라서 세금이 확 오르니 화나죠. 저도 화나더라”(이재명), “집값 올라간다고 부자가 된 것인가… 세금으로 다 뺏기지 않나”(윤석열).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억강부약을 강조하던 이 후보는 민주당이 부동산 감세 법안을 추진할 때 침묵하고, 윤 후보는 종합부동산세, 양도소득세, 취득세를 모두 깎아주는 종합감세안을 내걸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건강보험에선 병원비를 해결하는 보장성 종합 목표는 사라지고 탈모 등 개별 질환이 전면에 등장해 ‘동네 선거’라는 비판이 나온다. 조세 분야에선 이 후보는 공공연히 “별도의 증세 계획은 없다”고 말하고 윤 후보는 주식양도소득세를 폐지하겠다는 공약까지 내놓았다. 선거 때마다 공약집 마지막에 실리는 공약가계부(전체 소요재정과 재원방안)도 이번에 두 후보 공약집에선 볼 수 없다. 유권자 국민을 이리 가볍게 대할 수 있다니!

 

지난 10년 복지정책이 대선 의제 경쟁을 통해 복지국가체제에 부합하도록 정비되어야 할 시점에 의외의 장벽을 만난 셈이다. 누가 당선되든 지금의 공약에서는 불평등에 저항하는 아래로부터 목소리와 갈등이 클 듯하다. 세입자들은 집값 하락과 주거안정을 외칠 것이고,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실질적 소득보장 요구도 높을 것이다. 장수시대에 병원비와 노후생활을 걱정하는 한숨도 깊어지고, 청년들은 지속 가능한 연금을 촉구할 것이다. 증세 없이 계속 국채에 의존하는 나라살림은 소모적 논란에 빠질 수 있다.

 

그렇다면 대선 투표의 시야가 3월9일에 멈출 이유는 없다. 당선되지 않을 후보에게 던지는 표라도 그 후보가 담대한 의제와 절박한 민심을 담고 있다면 차기 정부에서 다른 목소리를 낼 씨앗이고 거름이다. 사표는 없다. 강요된 투표가 답답하고 속상한가. 내 몫을 위해 투표장에 가자. 모든 표에는 생명이 있다.

 

 

 

[정동칼럼] 모든 표에는 생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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