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약이 있어도 치료 못 받는 사람들

2021. 12. 10. 16:11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오건호 내만복 정책위원장

“돈이 없으면, 돈을 마련할 시간이 부족하면 죽어야 하는 게 의료 강국이라는 이 나라의 현실인가요? 정책을 결정하는 윗분들이 킴리아 건강보험 등재를 고민하며 한 달 한 달 평가를 미룰 동안 약이 필요한 아이들은 한 달 한 달 독한 항암제를 들이부으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킴리아 치료를 기다리다 끝내 아들을 품에서 떠나보낸 은찬이 엄마가 지난 10월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린 글이다.

 

‘킴리아’, 근래 기적의 암치료제로 불리는 신약이다. 기존의 항암제와 달리 환자 개인 맞춤 치료제이다. 환자 혈액에서 뽑아낸 면역세포를 환자 암세포를 공격하도록 배양한 후 다시 환자에게 주입한다. 이제 환자 암세포를 인지하는 유전자 정보가 입혀진 면역세포는 마치 유도탄처럼 암세포를 찾아 공격한다. 킴리아는 말기 급성림프구성백혈병 환자의 경우 10명 중 8명이 장기 생존할 만큼 약효가 분명하고 부작용도 적다. 게다가 단 한 번 주사로 암에 대응하는 ‘원샷 치료’이니 꿈의 치료제라 불릴 만하다. 킴리아는 한국에서는 생소한 신약이나 이미 30여 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다. 2017년 미국에서 처음 허가를 받았고, 일본에서는 2019년부터 건강보험이 적용되어 환자 치료에 이용되고 있다. 뒤늦었지만 한국에서도 지난 3월 식품의약처가 킴리아 사용을 허가했다. 가슴 졸이며 이 약을 기다리던 환자들이 마침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다른 대체약이 없어 오로지 이 약이 절실한 환자 200여명은 아직도 치료받지 못하고 있다. 해당 환자들의 평균 수명이 보통 3~6개월에 불과한데도, 식약처 허가 이후 9개월이 지나도록 건강보험에 등재되지 않은 상태이다. 앞으로 심사평가원 약제급여평가위원회, 건강보험공단과 제약회사(노바티스)의 약가 합의,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의결, 보건복지부 고시 등 거쳐야 할 관문이 많은데 지난주 열린 약제급여평가위원회는 아예 안건으로 다루지도 않았다. 도대체 우리나라 보건의료행정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무척이나 높은 약값 때문이다. 한 번 투약 비용이 무려 4억6000만원이다. 현재 미국에서 약 5억원, 일본에서 약 3억원이니 국제적으로도 초고가의 신약이다. 최첨단 신약 개발비용을 감안하더라도 제약회사의 지나친 이윤 추구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이렇게 약값을 두고 정부와 노바티스는 줄다리기만을 벌이고 환자들은 치료받는 날만 기다리다 세상을 떠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물론 지금도 식약처 허가를 받은 신약으로 치료를 받을 수는 있다. 환자가 전액을 부담하면 말이다. 환자 앞에 놓인 길은 두 가지이다. 4억6000만원을 마련해 치료를 받는 길과 기약 없는 건강보험 등재를 기다리다 세상을 떠나는 길. 지난 9개월 많은 환자들이 두 번째 길로 내몰렸고 오늘도 환자와 가족들은 두 길 앞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억하실 거다. 2017년 8월 서울성모병원에서 문재인케어를 직접 발표하면서 “아픈데도 돈이 없어서 치료를 제대로 못 받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던 일을. 올해 8월 문재인케어 4주년 보고대회에서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는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고, 치료비 때문에 가계가 파탄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정책”이라고 자랑까지 하였다. 그런데 알고 계시는가? 효과가 분명한 신약이 있음에도 돈이 없어서 치료받지 못해 생을 마감하는 환자와 가족들의 이야기를. 킴리아뿐만 아니라 다른 신약에서도 건강보험 등재과정이 이리 더디다는 사실을.

 

가슴 없는 행정과 과도이윤 경영이 만든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은찬이 엄마는 이러한 슬픈 일이 더 이상 없어야 한다며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아 호소하고 환자단체들은 50여일째 노바티스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건만 지난주 매달 열리는 약제급여평가위원회는 안건으로 상정조차 하지 않았고 노바티스 역시 버티기를 계속할 뿐이다.

 

행정과 이윤이 생명을 앞설 수 없다. 정부와 노바티스는 긴급히 건강보험 등재를 위해 협력하라. 더 지체되는 만큼 안타까운 생명이 쓰러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이번 기회에 생명을 다투는 신약은 식약처 허가와 동시에 건강보험 급여를 적용하는 ‘생명 직결 신약의 신속등재 제도’를 도입하자. 국제적으로 치료효과가 확인되고 국내 의약당국의 허가까지 받은 신약이라면 우선 OECD 회원국들의 평균 조정최저가를 활용한 임시가격으로 급여화해서 치료에 사용하고 이후 약가협상을 진행하여 최종가격과 정산하면 된다. 생명을 존중하는 상식만 잃지 않으면 길은 있다. 제발, 정부와 제약회사는 약값 협상에 환자의 생명을 볼모로 삼지 마라.

 

[정동칼럼] 약이 있어도 치료 못 받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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