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장애인의 투쟁 2막

2017. 9. 6. 15:57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오건호 |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오늘 혹시 광화문 전철역을 오가면서 지하 통로 어느 곳의 변화를 느끼신 분이 있는지요? 워낙 바쁘게 스쳐가는 서울 한복판의 전철역 공간이라 그냥 지나치신 분들이 많았을 겁니다. 어제까지 통로 한편에서 장애인들이 농성을 하고 있었지요. 부양의무제와 장애등급제 폐지를 외치며 5년 동안이나 말입니다. 


농성장을 지켜온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5년이나 이 자리에 서 있을 줄은 몰랐다고. 처음에는 하나도 없었던 영정 사진이 18개나 놓였습니다. 농성 기간에 기초생활보장제도와 장애인복지가 제 역할을 못하는 까닭에 안타깝게 돌아가시거나 장애인 권리활동을 하다 세상을 떠나신 분들입니다.이곳을 지나갈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미안함이 제일 컸던 것 같습니다. 비슷한 심정을 토로하는 지인들을 보니 사람 마음은 비슷한 모양입니다. 그래도 다가가 서명하거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마음으로 후원하며 지나가신 분들이 많았겠지요. 물론 꼭 이리 공공장소에서 천막을 쳐야 하나 눈살을 찌푸리신 분들도 있었을 거고요.


우리나라 장애인복지는 매우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장애인 출현율이라는 지표가 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은 100명당 15명인데 한국은 5.6명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만 장애인이 적은 걸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에 대한 인정이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지표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거리에서 장애인을 만나기조차 어려웠습니다. 장애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집 밖에 나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동권’, 2003년에 국립국어원 신어 자료집에 수록된 단어입니다.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말이지요. 사람에게 숨 쉬는 게 당연하듯이 ‘이동’이 권리라고 여겨지지 않았으니까요. 결국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섰습니다. 휠체어와 몸에 쇠사슬을 묶으며 ‘이동할 권리’를 외쳤습니다. 아, 나에게 이리 당연한 게 이분들에겐 이토록 절박한 일일 줄이야. 비장애인의 눈으로만 세상을 봐왔던 당시의 부끄러움이 떠오릅니다. 덕분에 ‘이동권’이 교통약자 관련법에 공식 정의되고, 대중교통 시설이 일부 개선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갈 길이 멉니다. 지금도 장애인들이 이동권 투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우리나라 장애인복지의 현주소는 예산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 규모는 2014년 기준 고작 GDP의 0.6%입니다. OECD 회원국의 평균은 2.1%로 우리보다 3배가 넘고요. 스웨덴(4.3%), 덴마크(4.7%) 등은 7~8배에 이릅니다. 근래 우리나라에서 복지가 늘었다지만 장애인복지는 2006년부터 계속 0.6%라니 얼굴을 들기 어렵습니다. 어제 국회 앞에선 장애인생존권 예산을 현실화하라는 기자회견이 열렸지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지만, 내년 장애인복지 예산이 전체 복지예산 평균 증가율에 비해 크게 못 미치는 것에 대한 장애인단체, 장애인부모들의 항의입니다.


철학자 롤스가 제안한 ‘무지의 장막’이라는 사유 실험이 있습니다. 사회적 논란이 큰 사안을 두고, 모두가 어떤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지 모른다는 가정에서 정책을 결정해 보자는 제안입니다. 지금은 제가 비장애인이지만 여기 가상의 사회에선 비장애인일 수도, 장애인일 수도 있습니다.


눈을 감고 자신에게 묻습니다. 부모인 나에게 부양의무자 기준이 적용돼 장애인 자식이 기초생활 수급자격을 얻지 못합니다. 과연 부양의무제를 존속시켜 가난에 대한 책임을 가족에게 물어야 할까? 지금 장애인복지를 제공하는 방안으로 장애등급제를 운영합니다. 장애인마다 지닌 개별적 여건을 무시하고 획일적으로 등급을 매기는 게 합당한 일일까?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장애인거주시설이 많습니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시설에서 살게 해 평생 사회적 삶에서 단절당해도 괜찮은가? 최근 뜨거운 논란을 낳는 특수학교 설립에 대해서도 물어봅니다. 내 자신이, 우리 아이와 조카가 다닐 수도 있는 학교인데 우리 동네에 설립한다고 반대해야 할까?


“시민 여러분, 저희는 9월5일 이곳을 떠납니다.” 어제 농성장 벽에 붙어 있던 현수막의 제목입니다. 문재인 정부와 실질적 개혁방안을 논의하되 투쟁의 끈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도 적어 놓았습니다. 이제 1막을 마감하고 더 넓은 곳으로 2막을 여는 거지요. 이번에는 부양의무제, 장애등급제 폐지 요구에 장애인거주시설을 더해 3대 적폐를 없애자 외칩니다. 응원합니다. 이동권에서 장애인 자립생활까지 장애인 인권의 역사는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했기에 5년을 버틸 수 있었다는 어느 참여자의 글을 읽으며 새삼 다짐합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힘껏 손을 잡읍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9052059005&code=990308#csidxd16143aa6cbd20faaa364e9aa51c7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