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만복 칼럼] "사월의 어머니와 오월의 어머니, 만나다"

2015. 6. 11. 13:30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내만복 칼럼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자식 죽었는데 돈이 무슨 소용?



최미정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 사회복지사




지난 5월 17일, 세월호 참사 397일째 되던 날, 광주에서 5.18 민중 항쟁 전야제가 열렸다. 이곳에는 안산에서 출발한 4.16 가족들도 참석했다.

당일 오전 8시 안산 합동분향소 주차장에는 4.16 가족들을 태우고 광주로 향하는 대형버스 3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내가 사는 집에서 합동분향소까지는 1시간 40분. 부랴부랴 집을 나섰지만, 가까스로 출발 5분 전에 도착했다.

노란 리본 앞에서 걸음을 멈추신 어머님

화랑유원지 입구에서 헐레벌떡 뛰다 보니 조금 앞에 삭발하신 한 어머님이 배낭을 짊어지고 걸어가고 계셨다. '휴~ 어머님이랑 같이 가면 되겠다' 싶었다. 숨을 좀 돌리고 "어머니~!" 외치려는데 어머님은 걸음을 멈춰 바람에 손짓하는 노란 리본을 들여다보고 계셨다. 결국 차마 부르지 못하고, 그렇다고 앞질러가지도 못하고 어머님 뒤를 따랐다.


 


▲ 고잔동 거리에 펄럭이는 노란 현수막. ⓒ프레시안(최형락)


멀리 먼저 와 계신 김선식 팀장이 보였다. 내가 일하는 '안산 정신 건강 트라우마 센터'에 계신 선배다. 오랫동안 안산에서 일해 온 사회복지사이신데, 잠시 안산을 떠나있는 동안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자 다시 안산으로 돌아왔다. '유가족'이란 별명답게 지난 1년 동안 가족이 가는 곳이라면 늘 곁에서 울고 웃는 사람, 가족들도 두 손 두 발 들게 하는 억척같은 팀장이다.

버스에 올라타 자리를 잡고 나니 노란 색깔의 유인물이 건네졌다. '광주민중항쟁 35주년 4.16연대 5.18 교육 자료'였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협의회(4.16 가족협의회)가 준비한 자료였다. 꽤 많은 양의 내용이었지만 5.18 민중 항쟁의 배경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그리고 4.16 가족들이 오늘 광주로 가는 이유에 대한 가족의 생각이 담겨 있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탓에 눈꺼풀은 무거웠지만, 자료를 만든 정성과 학창 시절 교과서로 배운 5.18 이야기를 떠올리며 마지막까지 읽어 내려갔다.

중간에 휴게소를 한번 들르고 나니 어느덧 국립 5.18 민중 묘지에 도착했다. 출발지는 다르지만, 진도 팽목항에서, 국민간담회가 진행된 목포에서도 시간에 맞춰 4.16 가족들이 모였다. 하늘은 무심히 맑았고, 우리는 참배를 위해 구묘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가족들뿐만 아니라 단체 티셔츠를 맞춰 입고 온 다양한 단체들이 보였고,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소리가 돌림노래로 들려왔다. 버스에서 자료를 읽은 탓인지 수백 명의 영혼이 잠든 그 땅에서 1980년 그날의 모습이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5.18 묘지에서 고개를 떨구신 아버님

입구에 세워진 간이무대에서 추모 행사가 진행될 무렵, 검은 양복을 입은 4.16 가족협의회 전명선 위원장, 찬호 아버지가 열사 한 분의 묘 앞에서 한참을 고개를 떨구고 계셨다.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찬호 아버지와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또 다른 아버님이 허리를 숙인 채 민주열사의 무덤에 듬성듬성 나 있는 잡초를 뽑고 계셨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무대에선 5.18 민중 항쟁 이후 오늘이 있기까지 짧지만 굵은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5월 어머니' 이야기 순서가 왔다. 하얀색 한복에 검은 목도리를 두르시고 옷매무새부터 풍겨오는 숭고함이란…. 뙤약볕에 앉은 모두가 어머님 한 분을 응시했다.

"묘 이전하면 1050만 원 준다고 회유하던 정부"

"긴말은 필요하지 않소. 내가 우리 세월호 부모들, 당신의 원통함을 아오. 무엇보다 밥 많이 먹고 아프지 말고, 이겨내소. 제발."

햇볕만큼이나 뜨거운 눈물, 흐느낌이 위로와 격려의 답변이 되었고, 이어서 5월의 어머니는 입술을 깨물고 4.16 가족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돈, 그놈의 돈 무어 필요 있소? 내 자식이 죽었는데…. 30여 년 전에도 묘를 이전하면 그때 돈으로 1050만 원을 준다고 가족들을 회유했지만, 많은 이가 버티고 자식들을 지켰소. 약해지지 마소! 내 그 마음을 아오!"

긴 여운을 남기고 그렇게 5월의 어머니가 4월의 어머니를 격려했다.

5.18 묘역에서 일정을 마치고 광주 시내로 나가 봉사자들이 챙겨주신 주먹밥과 특유의 맛깔난 김치로 배를 채우고 전야제에 참석했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도보 행진이었다. 금남로에 다다르자 오월 풍물굿이 반기고, 백발 어르신부터 아장아장 걷는 꼬맹이까지 많은 광주 시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5.18 민중 항쟁 희생자를 기리고 성스러운 날을 기념하기 위해 행렬 대열에 합류했다. 금남로 대열 양쪽에는 다양한 부스들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세월호 진실 마중'이란 이름으로 '광주 시민 상주 모임' 회원들과 세월호 리본을 만드는 부스, 세월호 아이들의 방이 꾸며진 공간이 눈에 띄었다.

참사가 있고 나서 가족들과 세월호 재판을 방청하고자 광주 법정을 종종 찾았다. 이때마다 법원 앞 가로수 길에는 세월호 가족을 격려하는 현수막과 큰 박수가 있었다. '힘내세요!'라는 외침으로 4.16 가족들을 격려해주었던 광주 시민들을 의미 있는 날에 뵈니 더더욱 반가웠다. 대열에서 손을 뻗어 그 내민 손을 잡으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행렬이 갈래로 나뉘고 무대 두 개가 들어섰다. 수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꾸민 무대다. 5.18 민중 항쟁뿐만 아니라 강정, 밀양, 용산, 쌍용차 그리고 세월호 참사 이야기를 각색한 무대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잠시 후 4.16 가족 모두가 뒤쪽 무대에 올랐다. 나 역시 함께 무대에 올랐다. 무대에 서는 게 어색하지만, 꽉 채운 무대에서 서로 떨리는 손을 잡아가며 앞을 응시해보았다. 수많은 시민이 가족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이는 이미 울음을 터뜨렸고, 어떤 이는 손짓으로 용기를 주기도 했다.

'천 개의 바람이 되어' 노래가 울려 퍼졌다. 4.16 가족 무대를 둘러싸고 광주 시민이 함께 노래를 불렀다. 35년이란 시간을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이 따랐을까? 버텨내기까지, 이겨내기까지, 그리고 시민이 한마음 되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혹독했을까? 노래가 끝날 때까지 계속 허공에 질문을 던졌다.

▲ 5.18 자료 사진. ⓒ연합뉴스


사월의 어머니와 오월의 어머니

노래가 끝나고 시민들이 터준 길로 양쪽 무대에서 4월의 어머니와 5월의 어머니가 만나는 퍼포먼스가 이어졌다. 이산가족 만나듯 모두의 힘이 모인 금남로에서 두 어머니가 뜨겁게 포옹하고 서로 목 놓아 울던 그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 나라에서 다른 시대에 태어났지만, 저 위에 있는 커다란 권력 앞에 자식을 묻은 어머니들의 눈물은 보는 이를 엄숙하게 했다. 광주 시민이 하나같이 '힘내세요! 잘 이겨내고 있어요!' 하며 두 어머니에게 쏟아내는 격려들은 광주 35년, 세월호 1년의 세월을 위로하고 또 힘을 전해주었다.

전야제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공식적인 전야제 이후에도 시내 곳곳에서 풍물놀이패가 활동하고, 학생들의 크고 작은 퍼포먼스가 벌어져 어두워진 거리가 대낮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근에서 따듯한 국밥 한 그릇 나누고 우리는 광주에 남아 다음날 기념식에 함께할 가족, 안산으로 올라갈 가족, 팽목항으로 이동하는 가족들로 나뉘어 움직였다.

나는 다시 안산행 버스에 올랐다. 출발할 때보다 버스 자리는 넉넉해졌다. 좀 편하게 몸을 뉘일 수 있겠다 싶었으나, 안산에서 출발할 때는 그렇게나 졸음이 쏟아지더니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버스 안을 살피니 잠들지 못하는 가족들이 많았다.

희생자 가족으로, 아이를 잃은 슬픔으로 지난 1년간 거리로 나섰던 가족들, 무관심과 조롱들로 고통받으면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아마도 광주에서 본 시민들의 외침이 가슴 속에서 요동치고 있어서이지 아닐까?

함께 웃고 울고 이야기하기

나는 지난해 6월 이곳 안산 정신건강 트라우마 센터로 왔다. 트라우마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내가 사회복지사 역할로 왔다. 여기서 일하면서 나 자신이 너무나도 작게만 느껴졌다. 어떤 때는 무모한 사람으로 스스로 평가 내렸던 순간들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잘난 사람, 특출한 사람일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 있다. 가족과 시민 곁에 함께 있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저 곁에서 함께 울고 웃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4.16 가족들은 지난 시간, 꿈속에서나마 먼저 떠나보낸 가족의 얼굴을 그리며 광화문에서, 청운동에서, 팽목항에서 간신히 한 고개, 한 고개 버텨오고 있다. 5.18 민중 항쟁 이후 지금까지의 기록들이 말해주듯,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니고 매번 다시 일어나 세상과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이 얼마나 두렵겠는가?

광주는 지금, 그러한 두려움을 떨쳐낸 시간을 거쳐 민주화의 성지라고 불린다. 광주는 전야제와 기념식에 참석한 정치인들마저도 함부로 색을 드러낼 수 없는 곳,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시내 한복판에 나와 함께 희생자를 기릴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광주의 현실은 오로지 희생자 가족들만 겪어낸 것은 아니다. 시민이 함께 고난을 겪어주었기에 이겨낼 희망이 생겼을 것이다.

4.16 참사를 겪는 안산은 어떠한가? 안산은 후세에 어떤 도시로 기억될 것인가? 그 답을 찾기 위해 사월의 어머니는 오월의 어머니를 만났다. 서로 손을 잡고 위로하고 힘을 보탰다.

국가와 온 국민을 흔든 4.16 참사였다. 직접 피해자뿐 아니라 지역주민, 온 국민이 함께 4.16 참사 이후에 달라질 안산과 대한민국을 그려나가야 한다. 4.16 참사를 기억하고 함께 행동해온 사람들은 안산이 '치유와 회복의 도시'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한다.

안산, 치유와 회복의 도시로 기록되길

광주가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듯, 나는 안산이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서로 돕고,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치유와 회복의 도시'로 기록되길 소망한다. 이를 위해 오늘도 4.16 가족을 만나고 주민들과 어울린다. 국민도 4.16 참사를 오랜 시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안산의 변화를 응원해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