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복지국가 전략을 내세우는 후보를 기대하며

2012. 8. 26. 17:19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복지국가 전략을 내세우는 후보를 기대하며


오건호 | 글로벌정치경제硏 연구실장 /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지난 4·11 총선에서 복지 의제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정치권, 특히 말로만 보편복지를 다루는 야권이 원망스러웠다. 대선에선 다르겠지 생각했는데 상황이 심상치 않다. 어느새 후보선출 투표 시점인데도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들로부터 복지국가 그림을 접할 수 없다. 몇 가지 사안별 복지 공약을 발표할 뿐 총괄적인 복지국가전략이나 복지재정방안을 내놓는 후보가 아직 없다. 

민주통합당이 얼마 전 세제개편안이라고 내놓은 건 고작 연 5조원 증세다. 올해 국내총생산(GDP) 약 1300조원 기준 0.4%다. 이것으로는 GDP 19%대의 부끄러운 조세부담률에 수치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의 연 1조원 증세안과 오십보백보다. 토목지출을 어떻게 절감할지, 어떤 항목에서 조세감면을 할지에 대한 로드맵도 없다. 실현 방안이 명확하지 않은 장밋빛 약속을 ‘포퓰리즘’이라 한다면 이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복지국가를 주창한다면 근래 국제경제 환경에서 ‘재정’ 의제가 처한 현실도 직시해야 한다. 20세기 서구에서 복지국가가 확장되는 과정에서는 ‘재정’이 복지를 충당하는 적극적인 거름이었다. 복지와 증세에 대한 국민적 합의로 조세부담률, 국민부담률이 오르면서 재정은 복지국가를 뒷받침하는 디딤돌로 여겨졌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고령화에 따른 의료·연금지출 증가,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증폭된 재정위기 등으로 재정이 지니는 정치적 성격이 변화하고 있다. 재정건전성 프레임이 작동하면서 재정 의제가 보수적 효과를 내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대응이 발 빠르다. 작년 4월부터 ‘재정위험관리위원회’를 설립해 운영하고, 12월부터는 ‘장기재정전망협의회’를 가동해 구체적으로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 기구들은 미래 한국이 직면할 고령화 위험을 강조하는 재정수치를 생산하고 재정안정화를 위해서는 복지확대가 곤란하다는 메시지를 던질 것이다. 이미 기획재정부는 야당의 보편복지 소요재정을 검증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올해 말에는 국민연금 장기 재정추계 결과를 발표해 연금 소진 불안을 상기시키고, 노인 의료 지출에 대한 위기감도 조성할 것이다.

한국은 고령화 속도가 어느 나라보다 가파르다. 고령화 담론이 심화될수록 미래 재정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증가하고, 보편복지세력이 내거는 ‘재정 확충을 통한 복지 확대’보다는 보수세력이 주장하는 ‘재정 관리를 위한 복지 억제’ 주장이 세를 얻을 수 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복지국가를 역설하는 정치권이 내놓은 게 선언적인 소규모 증세 페이퍼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보수세력의 재정건전화 공세를 이길 수 없고, 복지국가를 향한 국민들의 열의를 이끌어내기도 어렵다.

복지국가 후보라면 그에 걸맞은 재정혁신을 국가프로젝트로 내걸어야 한다. 올해 우리나라 재정규모는 GDP의 30.0%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42.5%, 유럽 평균 49.2%에 비해 현격히 낮다. 선진국에 비해 우리는 세입을 확충할 여력이 매우 크다.

물론 장벽이 만만치 않다. 국민들의 재정불신, 조세 저항이 크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를 넘어서려는 ‘증세정치’가 없다는 점이다. 모두들 복지국가를 위한 재정확충을 말하지만 이를 구현하기 위한 증세정치에 나서지 않는다. 자신이 복지국가 후보로서 재벌증세를 주창한다지만 재벌총수를 만나고 이를 압박하는 민심을 조직한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다. 국민들이 정작 문제를 느끼는 과세형평성이나 토목지출 개혁 방안도 속시원하게 내놓지 못한다. 이렇게 증세정치가 없는 곳에서는 국민들의 조세 저항이 미래 복지국가를 향한 조세 정의로 전환되기 어렵다. 대한민국 복지국가도 요원해진다. 

이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 맞설 야권 후보를 뽑을 차례다. 복지국가 재정혁신전략을 국가프로젝트로 삼는 후보가 나오길 바란다. 민주통합당 후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직 선거전에 등록도 하지 못한 안철수 원장, 진보정당 후보에겐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