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안철수의 '보편 증세' 공감

2012. 7. 29. 16:49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안철수의 생각>을 읽었다. 그의 불확실한 행보가 야권 대선 준비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던 터라 그의 책 출간이 반가웠고, 그의 ‘생각’을 읽은 후에는 반가움이 배가되었다. 주제마다 진보적 식견이 돋보였는데, 보편증세에 대한 그의 생각이 특히 그렇다.


그는 “보육, 교육, 건강 등 민생의 핵심 영역에서는 중산층도 혜택을 볼 수 있는 보편적 시스템을 단계적으로 도입하자”는 보편복지론의 입장에 서 있다. 그런데 재정방안이 남다르다. 복지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여유계층의 누진적 부담구조를 전제로 “소득 상위층뿐만 아니라 중하위층도 형편에 맞게 조금씩 함께 비용을 부담하면서 혜택을 늘려가는” 능력별 보편증세를 이야기한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국가가 건강보험 재정을 늘리고, 각 가정도 형편에 맞게 약간씩 건강보험료를 더 내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제안한다. 그래야 모두가 복지체제를 책임지는 동기를 가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참 용감하다. 1% 부자들을 향한 증세만을 주창하는 기존 정치권과는 접근법이 다르다. 한 보수일간지는 그의 보편증세론이 복지국가에 적합한 상식이라고 치켜세우면서도 지갑을 열어야 하는 ‘계산 빠른 대중’의 저항을 과연 극복할 수 있을지 의문을 표한다. 난 그의 용감함이 시대적 흐름을 읽은 데서 비롯된다고 해석하고 싶다. 이제 한국사회도 보편증세를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할 때에 접어들었다.

첫째, 보편증세를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민심이 생겨나고 있다. 아직도 국민들의 조세저항이 만만치 않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매우 전향적인 신호들이 나타난다. 이는 여러 조사에서 확인되는데, 작년 경향신문 65돌 기념 여론조사를 보면 “복지 확대를 위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으십니까”에 무려 62.6%가 동의했다. 특정 인물이나 정책에 대한 선호가 아니라 본인의 행위 방향에 대한 응답으로서 심상치 않은 수치이다.

둘째, 근래 유의미한 복지 체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복지 체험’이 충분히 쌓여야만 보편증세를 논의할 수 있다. 하지만 복지 체험을 양적인 범주로만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복지 체험에 대한 지표로서 더 중요한 건 복지에 대한 인식틀이다. 이미 시민들은 급식, 보육, 건강보험, 기초노령연금 등을 경험하면서 복지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하는 적극적 희망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셋째, 보편증세 논의가 확산될수록 증세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 종종 보편증세에선 일반 서민들이 상당한 세금을 내야 한다는 ‘세금폭탄론’이 등장하지만, 사실 이 폭탄은 상위계층 몫이다. 이명박 정부가 세율을 인하했을 때, 국민감세가 아니라 부자감세로 불렸듯이, 누진구조를 지닌 직접세에서 보편증세는 부자증세 성격을 띠게 된다. 보편증세 논란이 깊어질수록 서민의 몫이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이, 보편증세는 부자증세의 한 방편이라는 점이 확인될 것이다.

넷째, 보편증세는 조세정의를 세우는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국민들이 느끼는 조세저항의 대부분은 비효율적 재정지출, 취약한 과세형평성에서 비롯된다. 정치권에서 제기하는 부유세 방식의 증세는 극소수 과세대상의 세율을 인상하는 일로 종료될 뿐이다. 보편증세만이 시민 다수의 증세 동의를 이끌기 위해 재정지출 혁신, 과세인프라 구축을 동시 과제로 제기할 수 있다.

다섯째, 보편증세는 일반 시민들을 복지의 주체로 호명하는 일이다. 안 원장의 ‘생각’대로 시민들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기여할 때 복지체제의 지속가능성에 책임을 공유하게 되며 부자들에게 성실한 납세를 압박하는 ‘낼 테니 내라’ 운동도 가능해진다. 진보정당, 노동조합 등 전통적인 복지국가 주체세력이 취약한 한국에서 보편증세는 복지시민을 주체로 나서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옆의 동료가 말한다. 아직은 그의 ‘생각’일 뿐이라고. 이제는 그가 직접 시민들과 보편증세를 논의하길 바란다. ‘보편증세는 선거에서 독배’라는 한국정치의 통념이 깨지는 판을 보고 싶다.

오건호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실장 /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