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만복 칼럼] "우리 동네 건강 지킴이, 은평에서 만나요"

2014. 3. 17. 18:08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내만복 칼럼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건강 마을 공동체, 협동조합이 만든다!

 

 

민앵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그냥 의료생협도 하기 힘든 데 여성주의라니…. 

은평 지역에서 의료생협을 만들겠다며 여성주의자들이 모이기 시작한 지 벌써 6년이 지났다. 2009년부터 3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12년에 창립한 지 2년 만에 조합원은 어느새 1300여 명이 넘었다. 

은평에서 여성주의 의료생협을 꿈꾸다!

당초 나는 불광동에서 20년째 살고 있는 지역 주민으로서 의료생협이 생긴다는 데는 환영했지만 여성주의는 부담스러웠다. '여성단체를 운영하면 더 속 시원하게 활동할 텐데 여성주의 이름으로 왜 지역 활동을 하려고 하느냐, 의료생협은 지역 주민들과 같이 살자는 것인데 어려운 거다'라며 말렸다. 

하지만 이들은 평등, 평화, 협동의 건강한 마을 공동체를 지금, 은평에서 만들고 싶다고 했다. 비혼 여성, 독신 가정이 늘고 있는데 이들이 나이가 들더라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마을을 지금부터 준비하겠다고 했다. 10년 해보고 안 되면 다른 것을 하겠다고 말이다. 

참으로 감동적인 고백이었다. 내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2년을 지켜보기만 하던 나는 2011년 발기인 모임부터 같이 합류하였다. 여성주의학교도 수강했다. 지금 정관은 이때의 경험과 감동을 담고 있다.  

- 건강은 약자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실현됨을 믿는다.
- 안전하게 아이를 키우며 안심하고 노후를 맞이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는 서로 돌보고 돌봄을 받는 마을공동체에서 가능하다고 믿는다.

아직도 은평으로 이사 오지 않았니?

우리는 보통 버티다가 도저히 못 버틴다 싶을 때 병원에 가게 된다. 가서는 오랜 기다림 끝에 짧게 의사와 면담한 후 약을 잔뜩 타오거나 미심쩍은 마음으로 각종 검사를 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만든 병원은 다르다. (☞ 관련 기사 : "여성 환자에게 손목 쓰지 말라고? 밥해야 하는데?")

나의 건강한 삶에 관심을 가지고 경청하는 의사가 있다. 특별한 질병이 없더라도 불안이 느껴질 때 상담할 수도 있다. 보통 가족이 아프면 어디 아는 의사 없나 찾게 되지만 우리 조합원들에게는 가족 주치의가 있는 셈이다. 나이가 들면 부모님과 형제들의 질병만 살펴도 내 노후가 어떻게 될지 추측할 수 있다. 평생 건강관리를 해 주는 주치의가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믿을 수 있는 주치의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혼자 운동을 시작하면 작심삼일이고, 값비싼 건강보조식품도 운동만 못하다.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의료사협)에는 16개의 소모임이 있다. 사실 시간만 있다면 다 하고 싶을 정도다. 나이가 들면 모든 소모임에 다 참여할 작정이다. 새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외롭거나 아프거나 할 틈이 없을 것 같다. 걷기모임 풋풋, 주렁주렁텃밭모임, 산행모임 오투, 불어라 춤바람, 반려동물 소모임 반반이 있다. 이뿐만 아니라 3개의 기타 소모임, 스페인어 소모임 아블꼰에야, 와인 소모임 심방(심장병 예방), 교장놀이, 공동육아 소모임 친구야 놀자 등이 있다, 

'다짐(다-gym) 공간'이라는 병원 처방과 운동 처방을 연계한 운동 클리닉도 운영한다. 스탭댄스, 복싱써킷, 스트레칭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던 어르신은 다-gym에서 꾸준히 운동 클리닉을 다니시더니 6등급에서 4등급으로 체력이 향상되었다. 노년을 위한 근력강화 프로그램 '흰머리 휘날리며'도 인기가 높아 주 1회에서 2회로 늘린다.
 

▲ 2013년 7월 문을 연 운동센터 '우리마을 건강활력소 다짐'(다-Gym). ⓒ살림의료사협

 


작년 하반기부터는 나도 다짐에서 스텝댄스를 시작했다. 마침 수능을 마친 쌍둥이 딸들과도 같이 했다. 딸들과 딸 친구 모녀, 이렇게 5명이 같이 스텝댄스를 추러가는 날은 가는 길부터 행복하다. 

살림의료사협이 생겨서 마을에서 사는 게 너무 즐거워졌다는 이야기, 아직도 은평으로 이사 오지 않고 뭐하고 있느냐는 질책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나도 은평구에 20년 살았어도, 이곳은 아이 키우는 장소, 잠을 자는 장소이기만 했었는데 지금은 우리 마을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 동네의 청년들이 여기서 직장 생활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안심하고 늙어갈 수 있는 마을이 되게 해야겠다는 욕심이 자꾸만 생긴다.   

지역 주민, 풀뿌리 단체와 함께!

2014년 살림의료사협은 현재 조합원 1300세대, 출자금 4억5000만 원, 소모임 16개, 2개의 사업소(살림의원, 다짐)를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급속하게 자리를 잡은 데는 이미 활동하고 있던 시민사회단체들의 협력이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 2014년 2월 의료생협에서 의료사협으로, 전환·창립·대의원 총회. ⓒ살림의료사협


우선 살림이재단은 고 박영숙 여성재단 이사장이 운영하는 건물인데 역촌동에 있다. 공간 일부를 시민단체 인큐베이팅 목적으로 거의 무료로 일정 기간 사용하도록 해 주고 있었다. 살림의료사협도 살림의원을 만들기 전까지 1년 반 동안 이곳을 사용하였다. 

은지네(은평지역사회네트워크)는 이미 은평 지역에 자리 잡은 10여개 시민사회단체들의 모임이었는데, 지역 행사와 활동을 같이 하면서 신뢰를 쌓아나갔다. 은평시민회, 초록길도서관, 평생학습관 등 많은 단체들도 공간을 빌려주고 가입 출자하며 터전이 되어주었다. 은평구청과는 민관 협력 사업으로 '마이닥터클리닉'이라는 이름의 지역 건강 욕구 조사, 건강 메뉴, 건강 실천단 사업을 진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지역을 알아가고 신뢰를 얻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점차 지역주민들도 조합원이 되어가며, 창립 이전의 3년은 그렇게 흘러갔다.

이렇듯 살림의료사협은 초기 여성주의자들로 출발했으나, 점차 지역 주민들, 지역 사회단체들이 함께 만든 신뢰와 협동의 결과물이다. 살림의료사협은 지역 사회에도 활력을 주었고, 그 결과 은평신협, 은평두레생협과 함께 은평협동조합협의회가 꾸려졌다. 협동조합도 늘어나고 있다. 조만간 태양과바람에너지협동조합, 은평시민신문협동조합, 공동육아협동조합 '소리 나는 어린이집'과 더불어 최소 5~6개 협동조합이 협의체로 발전할 것이다. 은평 지역이 협동조합 운동의 메카가 되기를 기대한다. 

소비자 운동을 넘어선 건강한 마을 만들기

살림의료사협과 같은 협동조합은 한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연합회 소속 20개가 있다. 안성, 대전, 인천, 전주, 서울 등 전국에 걸쳐 2013년 말 기준으로 조합원 수 3만2711세대. 소모임 혹은 지역모임 150여 개가 있다. 의원, 한의원, 치과, 재가장기요양기관, 요양원, 운동센터 등도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운영된다. 

원래 이름은 의료생협이었다.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 제정을 계기로 한국의료생협연합회 소속 조합들은 모두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전환하기로 결의했다. 소비자 운동도 중요하지만 의료 복지의 공공성, 건강마을 만들기라는 지향을 담기에는 의료생협이라는 틀이 좁았기 때문이다. 의료사협은 의료생협의 이름만 빌려 영리를 추구하는 의료생협들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려는 의도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지역 사회에 대한 기여를 보다 본격적으로 추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의료사협의 지향인 '믿을 수 있는 진료'는 사실상 의료의 공공성에 해당한다. 꼭 필요한 진료를 하고, 적정한 비용을 책임지는 것은 조합원의 의료비 지출을 낮출 뿐만 아니라 표준 진료로서 타병원의 모범이 된다. 실제로 의료사협의 항생제 처방률이 매우 낮아 의료기관 평가 기준에 포함된 것은 모범적인 사례이다. 이렇게 믿을 수 있는 동네 의원이 있다면 무리해서 큰 병원에 갈 필요가 없어지고 2차, 3차 병원도 자기 역할에 충실하게 되어 보건의료 체계가 안정된다. 

'건강마을 만들기' 역시 소비자 운동에 국한될 수 없다. 혼자 운동센터에 등록을 해도 지속하기 어렵고, 좋은 건강보조식품을 먹는 것만으로 건강하고 즐거운 삶을 살기는 어렵다. 의료사협이 생각하는 건강은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고 즐겁게 더불어 살아가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각종 소모임과 운동 프로그램을 만들고 같이 이용한다. 내가 운동할 때 내 아기는 이웃이 봐 주고 그 이웃이 운동할 때 그 집 아이는 내가 돌보는 품앗이도 일어난다. 
    

 

▲ 공동 육아 소모임 친구야 놀자. ⓒ살림의료사협
  
서울 노원구에 있는 함께걸음의료사협은 자살예방사업단 행복드림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얼마 전 폐휴지 줍고 살던 상계동의 독거 노인이 돌아가셨는데 바로 이 행복드림센터의 자원봉사자가 작년 7월부터 돌보던 분이었다. 덕분에 돌아가시던 날 이른 아침 발견될 수 있었다. 

경기도 안산의료사협이 운영하는 꿈꾸는 집 요양원은 내 집 같은 곳, 임종도 가족과 같이 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 가족 간담회도 하고 간호도 할 수 있다. 조합원들은 이런 곳을 함께 운영하면서 건강할 때 돌보고 건강하지 못할 때 돌봄을 받을 수 있다. 아직 충분하지 않고 시작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의료사협은 지역사회 전체가 건강의 관계망으로 엮여 살아가는 마을을 꿈꾼다. 

풀뿌리가 만들어가는 건강 마을 공동체!

근래 정부가 의료 민영화를 추진하며 의료를 돈벌이 수단으로 내몰고 있어 국민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 그럴수록 시민들 스스로 건강하게 살자는 의료사협의 중요성이 더 커지는 듯 하다. 점차 의료사협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커지고 있다.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질병이 없을 것, 질병이 있거나 장애가 있더라도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며 살 것, 혼자 고립되지 않고 좋은 이웃과 웃으며 재미나게 살 것, 의식주를 비롯한 삶의 기반이 안정될 것, 좋은 보건의료 서비스, 좋은 먹거리, 좋은 환경, 안전한 마을….

우리는 '지금 내가 사는' 은평에서 이 꿈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풀뿌리 시민들이 만들어가는 건강 마을 공동체!



* 내만복 칼럼은 필자가 참여하는 팟캐스트 <만복라디오>에서 상세히 논의됩니다. 지난번 칼럼을 들으세요. (☞바로 가기 : http://mywelfare.or.kr/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