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21세기 부동산 봉건사회

2021. 4. 29. 11:33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

 

동네에서 몇 년째 텃밭을 가꾸고 있다. 새싹과 이파리들을 보는 즐거움이 크다. 이렇게 조그만 공간에서도 생명을 무성하게 키우는 땅이 참으로 위대하고, 잠시나마 일상에서 나오게 해주는 텃밭이 무척 고맙다.

지난 주말에도 텃밭에 앉아 땅을 예찬하다 문득 조선시대 어느 농민을 생각했다. 봄날의 찬란함은 오늘과 같았지만 그는 긴 한숨을 내쉬고 있다. ‘나에게도 땅이 있었으면….’ 매일 땀 흘려 일하건만 생산물의 상당을 지주에게 바쳐야 하는 세상에 대한 탄식이다. 그에게 땅은 고역과 착취의 전장이었다.

 

아마 요즘 부동산 사태 때문에 든 생각이었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인생을 가르는 신분제도 사라지고 헌법에 경자유전도 명시되어 있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에 억눌려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동네도 지난 1년 집값이 폭등해 다음 이사 때도 여기서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다. 사람들이 일해서 얻는 소득 수준을 비웃기나 하듯 치솟는 부동산 가격을 보면 화가 나다가도 결국 남는 건 막막함뿐이다. 땅이 삶을 억압하는 건 예전 봉건시대의 역사만이 아니다. 훌쩍 오른 전·월세 값을 충당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뛰어야 하는 집 없는 사람들이 사실상 21세기 소작인이다. 우리가 사는 곳도 여전히 봉건사회이다!

 

이런저런 상념과 안식의 공간이었던 이 텃밭도 올해로 문을 닫을 예정이다. 텃밭단지가 3기 신도시 사업에 포함되었다. 언제부턴가 텃밭 입구에는 높은 보상을 요구하는 험악한 문구의 현수막들이 자리를 잡았다. 정겨웠던 텃밭단지가 부동산 봉건사회의 각축장으로 바뀌는 거다. 그렇게 한 차례 홍역이 지나가면 집소유로 나누어진 신분화는 심화되고 부동산공화국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서구 역사에서 봉건시대를 종결 지은 건 혁명이었다. 어떤 모양일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사회에서 그 ‘혁명’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 대한민국 헌법에 담긴 토지공개념에서 시작하자. 헌법은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해야 하고”(23조), “국토의 효율적이고 균형있는 이용을 위해서 제한과 의무를 과할 수 있다”(122조)고 선언한다. 토지는 모두가 누려야 할 유한한 자산이므로 사적 소유를 인정하더라도 재산권의 행사는 공동체의 이익을 앞설 수 없다는 원칙이다. 앞으로는 국민들이 맺은 이 계약서를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그제 참여연대가 토지초과이득세법을 제정하자고 입법청원했다. 국회에선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법안을 대표발의한다고 한다. 토지초과이득세는 일반적 지가에 비해 가격이 많은 오른 유휴토지에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이다. 개인들이 가진 투기성 토지, 그리고 대기업이 고유 사업과 무관하게 대규모로 매입한 토지 등이 과세대상이다. 세금 수입을 늘리는 목적보다는 주거와 경영에 관련이 없는 토지는 팔도록 유도하려는 게 본래 취지이다.

 

일부에서 토지장부에서만 가격이 올랐을 뿐 실제 현금소득이 생긴 것은 아닌데 세금을 매기는 건 위헌이라고 주장하나 토지초과이득세는 완전히 헌법에 부합하는 제도이다. 이미 헌법재판소는 미실현이익에 대한 과세도 헌법의 지향에 따라 입법자가 채택할 수 있는 정책수단임을 확인했다. 다만 초과이득세를 납부했음에도 나중에 다시 매각 차익에 대해 양도소득세를 내야 하는 문제 등 일부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이 있었으나 정부가 곧바로 모두 보완해 합헌 제도로 인정받아 계속 시행되었다. 그런데 외환위기로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자 경기부양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던 김대중 정부가 토지초과이득세법을 폐지해버렸다. 당시 급박함은 이해하지만 굳이 없애야 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분명 헌법 내용을 훼손하고 이후 부동산 불패 역사를 촉진한 조치였다.

 

이제 토지초과이득세를 부활시키자. LH 사건으로 부동산정책의 대전환이 요구되는 지금이 적기이다. 이 세금으로 헌법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토지의 가격을 관리하여 서민 주거안정에 초석을 놓아야 한다. 특히 촛불혁명 정부를 자임하는 과반 의석 여당이 무거운 책임으로 나서기 바란다. ‘빚내서 집 사라’ 하고, 집부자 세금 깎아주자면서 지난 재·보궐 선거의 민심을 거슬러가다간 진짜 ‘혁명’을 맞을지도 모른다.

 

벌써 텃밭 이웃들끼리 내년에 어디서 텃밭을 할지 수소문한다. 아마 나도 새로운 둥지를 찾고, 봄이 오면 또 멍하니 텃밭에 앉아 생각의 나래를 펼칠 것이다. 그때는 조선시대의 어느 농민을 만나서 다른 인사를 전할 수 있을까. 당신의 후손들이 봉건시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출처: 21세기 부동산 봉건사회[경향신문]

 

[정동칼럼]21세기 부동산 봉건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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