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만복 칼럼] 우리는 '위험사회'에서 살고 있다

2020. 3. 20. 12:32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내만복 칼럼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기초생활보장제도 20년, '사회복지 생태계'의 모색

 

 

최예륜 빈곤사회연대 회원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는 울리히 벡(<위험사회>)의 말은 기후 위기와 생태계 파괴의 영향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실상 위험은 위계를 타고 흘러내린다. 자신과 타인을 지키기 위해 '잠시 멈춤-사회적 거리두기'를 할 수 없는 고단한 삶과 속수무책 무너지는 취약한 존재들이 속속 발견된다. 신종 바이러스는 이 사회 무수한 질문을 던지는데, 그중 하나가 누군가를 불안과 위험에 내버려 둔 채 우리 모두는 안녕하고 안전할 수 있는가이다.

가난은 나라님이 해결하고, 일자리는 기업가들이 만들어준다고들 한다. 누군가는 주고 '아래'에 있는 누군가는 받는다는 식의 일방적인 관계에 대한 상상은 우리가 관계 맺은 숱한 연결망을 가린다. 나의 일상은 여러 시공간, 숱한 재화와 서비스, 다양한 관계들을 통해 이어지지만, 그것을 만들어내는 타인 누군가의 깜냥껏 노동하며 근근이 꾸려가는 일상은 종종 존중받지 못한다. 조금 다른 존재적 조건이 몇몇 제도에 의해 정상이 아닌 것으로 분류되거나 남들에게 '쓸모'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갇히거나 숨죽인 채 살아간다.

우리는 사회복지라는 상호부조 시스템 속에서 '공공'이라는 것을 상상하고 국가에 그 역할을 위임한다. 국가-공공의 분배와 사회복지 실행은 구성원들의 상호부조를 중개하고 대행하는 역할에 가깝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원리와 세부 내용을 잘 알지 못한다. 삶이 팍팍해진 사람들은 복지를 맛본 적 없다 불평하고, '나랏돈' 받는 사람들은 '극빈'과 '쓸모없음'을 입증해야 하는 좁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상호 상관없는 남의 일처럼 여겨지는 제도적 분리가 일어난다.  

어려운 시절마다 복지의 요구는 높아졌으나, 사회복지는 분배정의나 사회연대의 전면 재고보다는 특정 세력 간 정치 문제로 다뤄져 왔다. 특히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복지는 무관심과 차별 사이에 머물며, 정치적 수사와 예산 압박을 오가며, 엄격한 자격심사와 최소한의 지원 수준으로 타협되어 왔다.  

 

ⓒ연합뉴스

 


'기초' '생활' '보장' 제도 20년의 정치와 권리운동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이하 기초법) 시행 20년이다. 기초법은 한국 사회 복지정책의 획기적 전환이라 일컬어졌다. 빈곤에 처한 누구든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필요한 급여를 실시하여 이들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자활을 돕는 것을 목적"(법 제1조)으로 하는 법적 수급권을 부여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최저생계비 개념을 도입해 "국민이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법 제2조 7항), 즉,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사회보장 최저선(내셔널 미니멈)을 정의했다. 생계급여뿐만 아니라 의료, 주거, 교육, 자활, 해산, 장제 등 통합급여를 보장함으로써 종합 빈곤지원정책을 표방했다. 1997년 IMF 외환 위기 이후 빈곤 심화 상황을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합의 하에 '기초', '생활', '보장'을 제도적으로 승인한 것이다.  

기초법 도입 배경은 당시 대규모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라는 노동권 축소, IMF 차관을 매개로 진행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떼어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김대중 정부는 '생산적 복지'를 주창하며 노동연계복지(workfare)를 강조했다. 투자 자유화와 노동의 불안정화 상황을 '신빈곤'으로 설명하는 담론은 빈곤 위험을 강조하지만 개인 경쟁력 강화를 주문하는 것이기도 했다.  

팍팍해진 사람살이에는 안전망이 없었다. 생활보호 '영세민'에서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를 위한 법이 만들어졌어도 많은 사람에게는 제도는 너무 멀었고, 제도 안의 사람들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뇌성마비장애인 최옥란 열사는 청계천 노점 장사를 접고 수급자가 되었다. 의료급여를 이용하려면 수급을 유지해야 하는데, 급여는 턱없이 낮은데다(2001년 당시 생계급여 26만 원), 일을 할 수도 저축을 할 수도 없었다. 수급비 반납투쟁을 벌이고,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명동성당 농성에 나서며 제도의 기만을 폭로했던 그는, 2002년 3월 절망 속에서 세상을 등졌다.  

노무현 정부는 '참여복지'를 내걸었다. '일을 통한 빈곤 탈출' 담론과 정책은 빈곤에 처한 사람의 문제를 효율성, 탈수급률이라는 성과지표로 둔갑시켰다. '사회'를 강조하는 담론은 무성한 가운데 정작 사회에는 저임금 불안정 일자리와 해고 위협이 늘었다. 빈곤과 불안정노동의 악순환이 심화되었다.  

이 시기에 복지와 사회서비스 분야에 시장화 바람이 불었다. 저출산‧고령화 대응책으로 제도화된 각종 사회서비스 사업은 민간 주도형 저임금 일자리로 채워졌으며, 한미 FTA 추진, 경제자유구역 지정 등을 계기로 의료분야 영리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당시 정부는 의료급여 수급권자가 '도덕적 해이'에 빠졌다며 본인부담금을 부과하고 비급여항목을 늘렸는데,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파스 남용 사례를 들어 '공짜의식'을 비난한 일화는 유명하다. 일부 극단적인 사례를 의료급여 수급권자 전체의 문제로 환원하는 낙인의 정치였다.

이명박 정부 들어 이런 기조는 더욱 강화되었다. 규제 풀린 시장 자유와 전국적 투기 바람은 공공의 자원과 권력을 편취함으로써 이루어졌다. 2008년 세계적 금융 위기 여파에도 각종 규제 완화 조치와 복지예산 감축이 이루어졌다. '능동적 복지'란 복지 긴축을 의미했다.

이 시기 기초생활수급자에 대한 공격은 노골적이었다. 2010년 사회복지 통합전산망이 도입되면서 색출에 가까운 부정수급자 '일제 단속'이 벌어졌다. 전산자료로 파악된 부양의무자의 자산, 소득 변동에 따라, 예고, 통보도 없는 무더기 탈락과 삭감이 단행되었다. "아들이 나 때문에 못 받는 게 있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애아동의 아버지를 비롯해 가난한 사람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의료급여 수급권자에 대한 근로능력평가기준이 도입되었다. 1/2종으로 나뉜 의료급여의 재정과 운영책임을 국민연금공단으로 넘기는 제도 개편 과정에서 졸속 시행된 이 평가기준은 수급권자의 인격을 무시한 질문으로 점철된 반인권의 단면이었다. 이 제도 개편 과정 중 2009년 용산구에서는 400여 명의 수급권자가 의료급여 강제 종별 전환을 겪었다.(같은 해 1월에는 용산참사가 발생하였다. 참사 당시 구청 외벽 간판에는 "구청에 와서 생떼거리를 쓰는 사람은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하오니 제발 자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박근혜 정부 들어 기초생활보장제도 개별급여 제도 개편이 이루어졌다. 생계, 의료, 주거, 교육급여 등 생활보장의 내용을 수급권자 상황에 맞게 맞춤형으로 제공한다지만, 실상 통합적 제도운영을 해치고 포괄적인 지원대책을 쪼개놓은 것이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생계비 기준선은 턱없이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고, 주거급여는 고삐 없이 치솟는 민간 임대료를 따라갈 수 없으며 공공임대주택 마련은 더디기만 하다. 촛불을 거치며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공약한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약속은 아직까지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각 급여별로 일부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가난의 책임을 가족에게 돌리고 '정상가족' 바깥의 사람을 과소인간으로 내모는 독소조항이 여전히 존치되고 있다.  



그 누구든 '거기' 내버려 두고 우리는 안녕할 수 없다 

기초법은 노동-복지 경계에 있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가운데, 제도 안으로는 자율성과 인권을 제한하며 최소한도의 지원을 유지하려는 속성을 갖는다. 제도 밖에서는 낙인찍힌 '수급자'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대로 손 내밀지 말라는 규율이 작동한다.

복지의 문을 두드리지도 못한 채 소리 없이 죽어간 '송파 세모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제도가 갖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기초법은 다만 인구 약 3%에 해당하는 극빈자-수급자만의 문제가 아니며 다른 일원적 복지제도로 쉽사리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최후의 보루인 기초법은 '기초', '생활', '보장'을 위해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사회복지제도의 기능과 역할이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지, 제도가 필요한 사람들이 현재 어떤 처지에 처해 있는지 드러내 왔다.  

'최저생계비'라는 개념은 인간다운 삶의 기준에 관한 사회적 합의에 관한 질문을 가능케 했다. 전문가위원의 비현실적인 장바구니 방식으로 최소한의 금액을 예산에 짜 맞추는 중앙생활보장위원회의 비민주성을 폭로할 수 있었고, 기초생활보장 개념이 복지 수급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최저임금과도 연관될 수 있다는 생활임금운동의 문제의식이 제기되기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의료급여 후퇴는 의료 시장화와 공공의료 축소라는 모두의 건강권 침해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권 보장 요구는 주거비 지원이 가난한 사람들의 고혈이 투기적 임대업자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현실과 개발정책의 문제점을 제기해오며 도시에 대한 권리와 모두의 주거권을 위한 운동과 만날 수 있었다. 사회 제반 문제들과 연결되면서 '수급권자'는, 그 누구도 어떤 상황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하나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기초법을 둘러싼 정치는 빈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이리저리 구획하며 개선·개악을 거듭했지만, 이를 매개로 한 권리운동은 누구에게나 더 나은 삶을 도모할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웠다. 나라님이 주는 것, 나라에서 받는 용돈으로서 복지수급이 아니라, 어려움에 빠질 때 손 내밀 수 있는 사회를 향한 신뢰와 연대의 관계로서 사회복지를 고민하며 기초생활보장 권리운동은 이어져 왔다.  

2012년부터 광화문역 지하보도에서 진행된 '장애등급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의 1842일에 걸친 농성은 2016~2017년 촛불을 거치며 더 이상 가난의 책임을 개인과 가족에게 떠맡길 수 없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냈다. 어려움에 처한 이를 돕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해치지 않도록 서로 돕는 것이며, 나도 곤란을 겪을 때 손 내밀 '사회'가 있다는 믿음과 안정의 기반이다. 이는 일방적인 베풂과 수혜의 관계를 넘어선 복잡한 관계맺음이다.

갈수록 심화하는 사회 불평등에 대응하며 분배 정의를 꾀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주고, 누군가는 받는다는 식의 일방적 관계맺음의 상상을 넘어서야 한다. 현금지원 재분배를 포함, 의료, 주거, 교육 등 제반 영역의 공공서비스를 강화하는 기초생활보장의 조건을 조직할 수 있는 '사회복지 생태계'가 필요하다.  

누군가는 이참에 푹 쉬어가자고도 하고 누군가는 리조트에 아지트를 꾸리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과로와 산업재해로 쓰러지고 멈출 수 없는 생업의 고단함 속 바이러스에 노출된다. 이러한 온도 차 앞에서, 정부는 당장 생계 곤란이 닥친 사람들을 지원할 '나랏돈' 아까워 벌벌 떨고, 임대료를 깎아준 '착한' 건물주들은 칭찬과 함께 정부 지원을 받는다. 자격심사가 동반되는 일시적 지원금(사용기간 제한 상품권)이 기본소득으로 둔갑해 지자체장들의 선정(善政)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물론 박수칠 일이다. 어려운 사람들은 어떤 방식의 복지 지원 확대라도 환영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다만, 지금의 사태처럼 모두가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있다고 여기는 재난이나 위기 상황에서 각각의 정치세력에 의해 추동되는 사회복지 지원은 향후 지속, 안정적으로 확장 가능한 사회복지제도의 고민과 함께 가야 한다. 앞으로도 우리에게는 크고 작은 위험과 위기가 각자에게 불균등하게 닥쳐올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의 위기로도 생존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불안정한 삶과 사회안전망 부재 상황을 이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일회적 현금 지원을 넘어서 우리 삶의 복잡성을 새롭게 연결 짓기 위한 안정적 제도 마련을 고민해야 한다. 국민기초생활보장의 역사와 긴급복지지원제도 등 기존 사회복지제도 전반의 점검과 보완, 제도 확대가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사회복지 생태계'의 운영원리가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억압, 차별하는 데 바탕을 두고 있지 않은지 성찰해야 한다. 가난과 고립상태에 남겨진 이들을 살피고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 누구도 생명의 자리, 인간의 자리로부터 박탈된 상태에 남겨두고서 모두의 안전과 안녕을 꾀할 수는 없다.  

일상이 격리인 삶은 없어야 한다. 일상이 차별과 낙인인 삶은 있어서는 안 된다. 폐쇄병동의 환자들과 수용시설의 장애인들의 삶과 죽음 속에서 배워야 하며, 지금 이 시각에도 서로를 헌신적으로 돌보고 있는 시민들의 경험을 나누어야 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고단함 속에서 불안한 시절을 견디고 있는 우리 모두의 삶이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

글로벌 시대 신종바이러스와 기후 위기, 또 다른 위험으로부터 우리 모두를 지키는 지혜를 얻기 위하여 함께 살아가는 인간 사회의 '사회복지 생태계'의 모색은 중요한 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역, 국가, 종을 넘어서 더욱 확장되어야 할지 모르는 '사회'를 고민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현재적 고통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지금껏 우리는 어떻게 연결되어 왔나.

 

 

 

* 출처 :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284210

 

우리는 '위험사회'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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