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12. 15:37ㆍ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내만복 칼럼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남성, 돌봄을 선택하다
"오늘 갑자기 회식이 잡혀서 늦는다고? 그래. 알았어."
뭔가 착잡한 표정의 아빠입니다. 오늘은 아내 없는 독박 육아. 하지만 독박이라는 표현은 육아를 위하여 직장을 퇴직한 아빠에게 가혹한 표현인 듯합니다.
필자는 아이를 돌보기 위하여 퇴사를 선택한 아버지들을 만나 그들의 육아 경험과 삶의 의미에 대하여 인터뷰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능동적인 퇴사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수동적(혹은 반강제적) 퇴사도 있었습니다. 퇴사의 성격이 다른 만큼 아이를 돌보는 경험의 전과 후도 달랐습니다.
제가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언론 매체를 통하여 소개되는 '육아하는 아빠'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는 남성이 가진 남성성의 다양성에 대해서도 이 글에서 함께 다뤄보고자 합니다.
한국 남성의 남성성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한국 남성이 가진 남성성은 여러 차원에서 달라지고 있습니다.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남성성의 표준이 달라졌다기보다는, 소수에 해당했던 유형이 점차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해야겠습니다.
소수 유형이라고 한다면 비전통적 남성성이라고 할까요. 크게 보아 전통적·비전통적 남성성으로 구분했을 때, 우선 전통적 남성성이란 다음과 같은 명제와 연관이 깊습니다. '남성은 힘든 일이 있어서도 내색하지 않는다', '남성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남성은 가족보다 일에 충실하며, 경쟁에서 승리하여야 한다' 등.
이러한 명제들 앞에서 남성은 운명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전통적 남성성의 범위 안에 가둬두고, 그 외의 목소리로부터 귀를 막기도 합니다. 자녀 양육의 측면에서 보는 남성성은 육아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에 오로지 소득자의 역할에 충실합니다. 또한 '경쟁과 성공'에 대한 지향이 강합니다. 경쟁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을 경쟁을 위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믿습니다.
2019년에 발간된 한 연구보고서에서는 이러한 남성성이 변화하고 있음을 포착하였습니다. 특히 20대, 대학생, 미혼 등 청년층의 남성들은 '경쟁과 성공', '위계와 복종', '성적 능력과 물리적 힘', '감정 절제'로 요약되는 전통적 남성성에 있어서 가장 낮은 동의 정도를 나타내었습니다.(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9) 바꾸어 표현하자면 이제까지 '여성적' 역할과 기질로 인식되어왔던, '요리와 가사', '정서적 관계 맺기'에 대한 수용도가 높고, 가사 분담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이제까지의 전통적 남성성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전통적 남성성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제가 만났던 몇 명의 아버지들은 육아를 전담하기 위하여 퇴사를 선택하였습니다. 그 이유와 경로는 다양합니다. 육아 휴직 이후 직장 복귀를 시도하였으나, 이전의 업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부서로 강제 배치되었다는 아빠가 있었던 반면, 육아를 통해 새로운 삶에 눈을 떠 육아 퇴직을 결심하였다는 아빠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생각보다 무난했던 섭외로 순탄한 인터뷰를 예측했지만, 막상 아빠들은 인터뷰 질문에 있어서 결론 위주의 간결한 대답으로 일관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질문에도 시원시원하게 대답이 쭉쭉 이어지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질문을 던지고 한참을 기다려 돌아온 답은 "네, 그렇죠", "아니요. 꼭 그런 아닌 것 같아요" 이후에 생각에 잠겨서 머릿속을 정리하곤 했습니다. 짧고 간결하게 결론만 이야기하는 습관은 타고난 것일까요?
그러던 중 아빠들의 침묵을 깬 주제는 거의 대부분 '육아' 이야기였습니다. "자녀를 혼자서 육아하면서 어떤 생각을 주로 하셨어요?"라는 질문에는 상당히 격한 어조와 이전과는 다른 빠른 말투로 대답하는 남성들을 발견하였습니다. 아이에 대한 이야기부터, 아이를 둘러싼 주변 환경, 육아하며 겪는 심리적 어려움 등등 육아라는 주제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단 하나의 질문에서 거의 다 들을 수 있었습니다. 육아를 통하여 자녀의 성향과 습관을 발견해 낸 경험을 이야기할 때면, 주양육자로 대표되는 엄마의 모습. 딱 그 이미지를 닮아있었습니다.
남성이 주양육자가 된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몇 가지 키워드를 통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울감'입니다. 일정 기간 육아를 전담한 남성들은 기본적으로 우울 증상을 겪습니다. 추측건대, 이제까지 믿고 살아왔던 자기 자신을 잃는 기분에서 비롯됩니다. 거친 세상 속 경쟁을 위하여 가족을 떠났던 그가 아닌, 자기 팔길이 정도 되는 아이 목욕에 안 쓰던 근육까지 써서 삭신이 쑤시는 자신을 마주합니다. 도태되는 느낌, 경쟁에서 밀려나는 느낌에서 가장 큰 우울감을 겪습니다.
우울감을 어느 정도 극복해 내면, 달라진 일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저는 이 키워드를 '빨간약'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 빨간약은 영화 <매트릭스> 1편에 나온 약입니다. 먹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자 이제까지 외면했던 현실에 눈을 뜨게 되고 이전으로 돌아가기가 어려워집니다. 육아를 위해 퇴직을 결심하는 것이 삶의 한 방향성이자 새로운 대안적 옵션이 되는 순간입니다.
육아 초기에는 산발이 되어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지쳐 잠들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전쟁 같은 적응기를 버티고 나면 패턴이 잡히고 일과를 컨트롤할 수 있게 됩니다. 아이가 낮잠을 잘 때면 하루의 중간 쉼표를 찍으며 소소하게 집안 정리를 하거나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갖기도 합니다.
바쁘고 고된, 그리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돌봄과 가사는 어느 순간 충분하게 극복되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양육자로 산 시간 동안 아빠들에게 남은 것이 무엇일까요? 저와 인터뷰한 아빠들은 공통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엄마만 찾던 아이가 어느 순간부터 아빠만 찾게 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것을요. 그것은 이제까지 추구하던 행복의 방향과 내용이 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육아 퇴직이라는 함축적인 단어는 사실 가족지향적인 삶을 선택한, 전통적 남성성의 거부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전통적 남성성은 가족을 위해 가족을 떠나 직장에 헌신하라고 말합니다. 소처럼 일해서 돈 벌어다 주는 것이 가족을 위한 아빠의 역할이라고 자위하게 만듭니다.
물론 중요하고 고귀한 일입니다만, 남성 혼자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구조가 해체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가족의 삶을 보다 안정적이고 윤택하게 만드는 것은 가족과 부대끼며 돌봄과 관련된 일들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전통적 남성성은 육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가로막고 있으며, 중장년 남성이 가족으로 돌아올 수 없도록 하는 커다란 장애물입니다.
가족 내 역할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육아를 위하여 퇴직을 선택한 아빠들은 간간이 밀려오는 후회와 두려움과 "싸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경력 단절과 소득의 감소가 가장 큰 후회이자 두려움이었습니다. 사회적 위치가 모호한 것에 대한 위축감도 있었습니다. 주변의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육아를 선택한 결정을 되돌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수시로 엄습해오는 불안감을 이겨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터뷰 말미에서 남성이 육아에 더 적합한 것 같다고도 이야기했습니다. 섬세함은 떨어지지만, 체력이나 근력에 있어서 육아에 불리한 몸(?)은 아니라고요. 안 해본 것뿐이지, 막상 해보면 여성에 비해서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성이 가사 노동과 자녀 돌봄을 타고나게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발견은 전통적 남성성이 심어준 편견을 깨주었습니다.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고, 안다고 생각했던 '엄마'라는 존재를 이해하여 공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국 남성의 육아 휴직 비율이 매년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멉니다. 더 많은 숫자가 육아 휴직을 경험하여야 하고, 육아를 전담해보며 느끼는 희노애락을 통하여 인생의 새로운 한 챕터를 써보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바람은 남성의 육아 휴직을 강제하는 제도적 조치를 필요로 하면서도, '강제'라는 단어가 주는 반감을 떨쳐내기 어렵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선택 가능한' 사회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성의 육아를 지원하는 제도적 조치들이 날로 확대되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선택 가능하지 않습니다. 선택 이후에 있을 부작용에서 자유로워야 하고, 선택 과정에서 주어지는 압력과 부담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는 여러 가지 과제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용기를 내어 주양육자로서 전담 육아의 삶을 살아보는 빨간 약을 선택해본다면, 이제까지 한국 남성에게 요구되었던 남성성의 범주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육아 퇴직한 아버지들에 대한 인터뷰 이후 3년 정도가 흘렀습니다. 그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집니다. 아마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일상이 아니라, 앞뒤 좌우를 둘러보며 계절의 변화를 민감하게 느끼는 삶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갑작스러운 회식으로 귀가가 늦어진다는 아내의 연락에 복잡한 심경을 느끼면서 남은 하루 일정을 다시 짜는 남성. 남성성의 한 유형으로 자리매김 하기를 바래봅니다.
* 출처 :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282904
'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 > 내만복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만복 칼럼] "올해 뭐 먹고 살지?"..."작년에도 똑같은 말 했어" (0) | 2020.03.24 |
---|---|
[내만복 칼럼] 우리는 '위험사회'에서 살고 있다 (0) | 2020.03.20 |
[내만복 칼럼] 선거연합 정치, 가능할까 (0) | 2020.03.04 |
[내만복 칼럼] 비정규직에게 '육아휴직'이란? (0) | 2020.02.27 |
[내만복 칼럼] '엄빠' 없이 온 신혼부부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0) | 2020.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