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청년기본소득, 지금 필요한가

2019. 3. 27. 14:47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장




지난 25일부터 고용노동부가 주관하는 청년구직활동지원금 신청이 시작되었다. 2016년부터 서울시가 시행한 청년수당을 거의 본떠 중앙정부가 전국적으로 벌이는 사업이다. 취업을 준비하는 일정 소득 이하의 청년에게 월 50만원씩 6개월간 지급한다. 금액과 프로그램은 조금씩 다르지만 많은 지자체에서도 청년수당을 도입하고 있다. 중앙정부는 졸업 후 2년 이내, 지자체는 2년이 지난 청년에게 수당을 지급하기로 서로 조정했다. 일부 지자체는 이미 접수 중이고 다음주엔 서울시도 시작하니 ‘청년수당 시즌’이다. 


최근에는 아예 새로운 설계도가 등장해 다른 방향에서 논란거리다. 일부 연구집단이 서울시에 제안한 청년기본소득 실험이다. 여러 기준을 따지는 현행 청년수당을 넘어 청년 모두에게 조건 없이 매달 50만원을 지급하자는 내용이다. 이는 실험, 혁신, 상상 등의 진취적 상표를 붙이고 있어 선뜻 비판하기가 쉽지 않다. 혹 반대 이미지의 사람이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늘 그러하듯이 ‘수당 전성시대’라 비꼬는 따가운 시선도 있다. 무분별하게 수당들이 신설된다는 지적이다. 사업별로 꼼꼼한 검토는 필요하지만 지나친 딴지 걸기로 보인다. <88만원 세대> 책이 출간된 게 2007년이다. 이후 정치권이 앞다퉈 청년을 내세웠지만 정작 청년들을 위한 복지는 얼마나 발전했는가? 한국고용정보원 조사에 따르면, 청년들의 취업 준비기간이 평균 11개월이고 취업준비금으로 월 45만원을 사용하며, 이 중 절반의 청년들이 아르바이트를 통해 비용을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년수당은 지자체가 선도하며 전국적으로 확산된 모델 사례이다. 응원하면서 보완해 가자. 


기본소득이 정치적 에너지를 지니면서 국내외에서 그 의미가 넓게 사용되고 있지만, 기본소득 원형의 토대는 ‘무조건성’이다. 보통 청년, 불안정 노동자, 가난한 예술가 등이 기본소득의 대표적 수혜자로 소개되지만, 여기서 ‘무조건’의 핵심은 취업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취업자도 포함된다. 사회경제적 필요를 지닌 불안정 소득계층이나 특정 연령집단에 주목하는 복지국가의 현금급여와 구분되는 특징이다. 기본소득을 표방하는 성남시와 경기도의 ‘청년배당’조차도 대부분이 미취업자인 24세 이하 연령대를 대상으로 삼는다. 취업자 논점을 피하려는 유연함으로 읽힌다. 서울시를 비롯해 지자체가 시행하는 청년수당들 역시 미취업자가 대상이다.


외국은 어떨까? 


1982년부터 원유채굴권에서 발생한 영구기금 수입을 시민 모두에게 제공하는 미국 알래스카주를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기본소득’으로 알려진 사례들 역시 일반 취업자는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은 실업부조 수급자,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실험은 생계급여 수급자가 대상이다. 최근 보도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이탈리아의 기본소득(시민소득)도 저소득계층, 극빈층을 위한 정책이다. 대부분 ‘복지 덫’에 처한 취약계층들에게 근로 동기를 부여하려는 프로그램들이다. 일을 해서 소득이 생겨도, 즉 ‘취업’해도 기존 현금급여를 지급한다는 의미에서 ‘기본소득’으로 불리지만 여전히 대상은 실업자, 불안정 취업자, 빈곤층 등이다. 이름이 무엇이든 현행 제도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혁신적 시도로 평가할 만하다. 


이러한 면에서 서울시에 제안한 청년기본소득은 대담하고 이례적이다. 19~29세 청년이 대상이니 현재 고용률이 70%에 이르는 20대 후반의 취업자도 모두 포함된다. 조건 없이 지급되니 아마도 청년들의 만족도는 현행 청년수당보다 좋으리라 예상되지만 서울시에서 전면 시행하면 연 8조원, 전국적으로 확대하면 연 40조원이 드는 대규모 사업이다. 


기본소득은 인류사회에 무척이나 미래지향적인 기획이다. 언젠가 인공지능에 의해 다수가 노동에서 분리되는 상황이 온다면 기본소득 방식의 프로그램이 긴요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며 산다. 취업자까지 포함하는 정책 실험이 필요한 때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이유이다. 정작 기본소득을 시행해야 하는 시대에는 노동시장 여건이 현재와 아주 다를 텐데, 지금의 실험 결과가 그때 얼마나 유용할까. 기존 복지제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권장해야 하지만 청년기본소득은 오늘의 시점에선 실험을 위한 실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청년들을 위해 더 많은 정책이 추진돼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정책 실험도 해볼 수 있다. 동시에 그 적합성을 따져보는 엄밀함도 요청된다. 왜 당신은 상상하지 않느냐고 핀잔받을지 모르겠으나 ‘지금 여기에’ 충실하자는 취지이다. 먼 산을 바라보느라 발 앞의 절박한 일을 놓쳐버릴까 걱정해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3262015005&code=990308#csidxdf3e718d7a9f784a6b931818415a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