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8. 20:35ㆍ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는 의례적 기구로 전락했다. 재정이 제구실을 다하려면 기본 규모를 갖춰야 한다. 미래를 향한 재정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복지비 그냥 올해까지 30%, 내년까지 40%, 내후년까지 50% 올려. … 그래 무식하게 했어야 되는데 바보같이 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 미완성 원고를 다듬어 출간된 <진보의 미래>에 나오는 내용이다(234쪽).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국정을 되돌아보며 무엇 때문에 이렇게 탄식한 것일까?
바로 국가재정 ‘전략’이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국정 철학을 재정으로 구현하고 싶었다. 다음 해 예산안을 편성할 때 일선 사무관이 행정적으로 첫 단추를 끼우는 상향식(bottom-up) 방식에만 의존하지 않고 예산안 기획부터 정부의 국정 철학을 반영하는 전략적 편성(top-down)을 원했다. 예를 들어 기초생활보장, 보육료 지원, 실업급여 등 개별 복지제도의 예산안 수치를 모아 다음 해 복지예산 총액을 도출하는 기존 방식 대신, 중장기적인 국정 전략에 따라 복지예산의 총량을 먼저 설정하고 개별 제도를 이 한도에서 조정하는 방식이다.
이에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예산회계법과 기금관리기금법을 폐지하고 새로이 국가재정법을 제정해, 개별 부처를 넘어 국정 분야별로 예산을 편성하는 ‘분야별 예산’ 체계를 도입했다. 그 결과 올해의 경우 중앙정부 총지출 400조5000억원 가운데 복지 분야 129조5000억원에는 보건복지부뿐만 아니라 여성부·고용노동부 등 10개 부처가 주관하는 복지 성격의 사업들이 망라되어 있다. 이 작업을 위해 노 전 대통령은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신설하고, 매년 봄 과천 공무원연수원에서 1박2일 동안 장관들과 넥타이를 풀고 이듬해와 향후 5년의 분야별 총액을 논의했다.
그렇다면 노 전 대통령은 <진보의 미래>를 쓰면서 왜 복지비 예산을 한탄했을까? 애초 자신의 뜻을 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정 운용을 획기적으로 달리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하고서도 실제 국정에서는 ‘전략적 편성’을 구현하지 못했다. 아마도 노 전 대통령이 지금 청와대에 있다면 ‘2016년 우리나라 복지 지출은 GDP의 약 10%로 OECD 평균 21%에 비해 절반에 불과하다. 내 임기 5년 동안 최소한 GDP 15%까지는 도달하겠다. 매년 GDP 1%포인트만큼 복지예산을 늘려 나가자’고 지시했을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는 다소 의례적 기구로 전락했다. 두 정부 모두 국가재정을 통해 이루려는 큰 국정 비전이 없었고 재정수지 적자가 계속되면서 재정 역할을 적극적으로 기획하기도 어려웠다. 집권 기간 내내 긴축재정을 강요해 재정은 계속 빈약했다.
ⓒ연합뉴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19일 오전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열린 국가재정 운용계획 국무위원 토론회에 참석,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04.6.19 |
재정이 제구실을 다하려면 기본 규모를 갖춰야 한다. OECD 전망에 따르면, 대한민국 재정의 크기는 올해도 GDP의 32%에 그칠 것이다. OECD 평균 41%, 유로지역 평균 48%에 비해 턱없이 작다. 재정 규모가 커져야 사회지출을 늘릴 때마다 제기되는 예산 압박을 넘어설 수 있다. 특히 연 7%씩 지출을 확대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J노믹스’에서는 더욱 그렇다. 기획재정부에 문의하니, 올해 국가재정전략회의는 아예 준비조차 못하는 모양이다. 보통 4~5월에 개최하는데 정권 교체 상황이라 새 정부의 뜻에 맡기자는 취지로 이해된다.
1인당 GDP는 3만 달러에 육박… 복지 지출은 OECD 평균의 절반
노무현 정부를 계승한 문재인 정부다. 촛불민심이 만들었다. ‘다른 대한민국’을 천명한 정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루지 못한 꿈, 미래를 향한 재정 전략을 추진하기 바란다. 마침 청와대 비서실에 ‘재정기획관’을 신설할 예정이다. 이전에 없던 자리여서 경제부처가 당혹해한다는데 노 전 대통령의 숙원을 구현하려는 노력으로 믿고 싶다.
재정을 재정답게 만들자. 1인당 GDP가 3만 달러에 육박하는 나라인데도 복지 지출이 OECD 평균의 절반에 그치고 있다.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합한 국민 부담률의 부족액은 GDP의 약 8%, 올해 금액으로 무려 140조원이다. 이 금액을 충당하면 중앙정부 단위의 복지를 지금보다 2배 이상 늘릴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이 내놓았던 ‘희망 2030’을 잇는 문재인표 국가비전도 추진할 수 있다.
아마도 지금 노 전 대통령이 <진보의 미래>를 통해 깨어 있는 시민들에게, 그리고 신뢰하는 친구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다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대담하게 재정 전략을 짜라!”
'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 > 언론 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향] 30만원, 또 줬다 뺏을 건가요? (0) | 2017.07.12 |
---|---|
[경향] 국민연금의 현세대 편향 (0) | 2017.06.14 |
[닥터뉴스] 보장성 잡아먹는 실손..."건보료 올려서 해결하자" (0) | 2017.06.04 |
[미디어오늘 팟캐스트] 미오캣, 오건호 공동위원장 출연! (0) | 2017.05.24 |
[메디포뉴스] 실손의료보험은 실패한 정책 (0) | 2017.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