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22. 12:24ㆍ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오건호 |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내 안에서 기본소득을 둘러싼 상반된 두 생각이 다투었다. 솔직히 애초 기본소득에 마음이 가진 않았다. 인공지능이 모든 걸 생산하는 세상이라면 기본소득을 말할 것이다. 시민의 권리로서 먹고살 만한 금액의 기본소득은 무척 매력적이다.
그런데 지금이 그때인가? 혹시 오늘의 산적한 문제를 푸는 데 기본소득은 안이하지 않은가? 복잡한 복지 숙제들을 한 방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호기가 불편했다.
대놓고 비판하지는 못했다. 기본소득에 담긴 시대적 열정을 존중했다. 힘든 삶을 살아가는 시민들의 절망, 분노, 요구가 기본소득에 깃들여 있다. 사회를 접하자마자 아르바이트 혹은 장기 취업준비생으로 몰려야 하는 청년들을 생각하면 그들이 상상하는 기본소득을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장애인연금을 두고 고심하는 장애계를 만나선 아예 장애인 기본소득으로 이름을 바꿔 요구하자고 제안도 했다. 그래야 더 힘이 실릴 듯해서 말이다. 사회운동의 시야로 보면, 헬조선을 넘어설 대안 상이 변변치 않은 진보 아노미 상황에서 그래도 기본소득은 새 희망을 키우려는 사람들의 분투이기도 했다.
사실 보편복지와 기본소득은 모두 보편주의를 지향하지만 족보가 다른 제도이다. 보편복지는 ‘필요에 따른’ 보편주의로서 노동시장 밖에 있어 별도 소득이 필요한 아동, 장애인, 노인 등을 대상으로 삼는다. 여기에는 보육, 주거, 의료, 요양 등 사회서비스도 있고 아동수당, 기초연금처럼 현금을 지급하는 사회수당도 있다.
근래 떠오르는 청년수당도 수급 대상이 노동시장 밖에 있다면 신규 사회수당과 다름없다. 실제 성남시가 기본소득의 취지로 청년배당을 설계했다지만 대다수가 노동시장 밖에 있는 24세 이하를 대상으로 하기에 청년의 특별한 ‘필요에 따른’ 사회수당에 훨씬 가깝다. 반면 기본소득은 노동시장에서 소득이 있든 없든 ‘무조건’ 지급된다. 여기에선 아동, 청년, 노인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까지 동일 금액을 지급받는다. 이처럼 두 제도는 설계 원리에서 노동시장 참여자를 포함하느냐 여부에 따라 확연히 구분된다.
그래서 두 생각이 계속 갈등했다. 기본소득이 정책적 선택으로 어설프다 판단하면서도 시대적 에너지를 주목해야 했다. 소득이 없는 사람에게 현금 복지를 지급하기 위해 이미 소득을 가진 사람에게도 예산을 사용하는 게 적절한 걸까, 보편복지의 틈새가 있다면 이를 보완하는 게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다시 이세돌이 알파고에 무너지고 무인 자동차가 거리를 주행한다는 소식에 흔들리는 마음.
다행히 요즘 두 생각이 의외로 조정되는 느낌이다. 내가 무엇을 더 탐구했다기보다는 기본소득이 현실 지형으로 내려온 덕택이다. 좌우파를 넘나들며 기본소득 유형이 너무 다양해 종잡을 수 없다는 지적도 있지만, 이번 대선을 계기로 우리나라 기본소득 논의가 사회수당으로 수렴하는 경향이 확인된다.
작년 가을부터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아동·청년·노인 기본소득을 제안했고, 박원순 시장은 여기에 실업부조·장애수당·상병수당을 더해 ‘한국형 기본소득제’를 주창했다. 이재명 시장도 아동·청소년·청년·노인을 대상으로 생애주기별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내놓았고, 김부겸 의원은 청년기본소득법안까지 발의했다. 모두 이름표는 ‘기본소득’이지만 사회수당과 다름없다. 나아가 심상정 후보가 기본소득을 농민, 문화예술인에게 확대하고 이재명 시장이 농어민을 이야기하지만 이 역시 업종의 특수성을 반영한 현금지원제도로서 사회적 정책수당에 속한다.
대선 공약 중에서 기본소득 DNA를 가진 정책은 국민 모두에게 월 2만5000원씩 제공하는 이재명 시장의 토지배당이 유일하다. 생애주기별 사회수당 패키지에 포함시켜 소액이라도 기본소득 실험을 해보려는 취지이나 월 2만5000원의 현금복지를 위해 연 15조원의 예산을 사용하자는 제안에 시민들이 귀기울일지 의문이다. 금액이 낮으면 실효성이 미미하고 금액이 높으면 예산 장벽을 넘기 어려워 지금 정책 선택지는 아니라 판단한다.
결국 우리가 대면하는 건 보편복지의 사회수당과 사회수당형 기본소득이다. 사회수당이 왜 기본소득이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지만 이름이 무엇이면 어떤가, 오늘 걷는 길이 같으면 함께 가면 된다. 대신 어떻게 길을 개척할지를 두고 머리를 맞대자. 도깨비방망이처럼 재정이 조달되는 게 아니라면 어디서, 얼마를, 어떤 힘으로 마련할지 실행프로그램을 세우자. 단기에 모든 재정을 조달하기는 어렵기에 어떤 수당부터 실시할지, 사회서비스는 무엇부터 챙길지 로드맵도 만들자. 이렇게 함께 가다보면 족보를 뛰어넘어 형제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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