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누리과정 해법, 대통령 공약집에 있다

2016. 1. 20. 10:35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오건호 | 내가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누리과정이 끝내 파국을 맞았다. 오늘부터 누리과정 비용이 지원돼야 하건만 서울, 경기는 아예 책정돼 있지 않고, 비수도권 다수 지역은 기약도 없는 중앙정부 지원을 전제로 일부 배정했을 뿐이다. 무난한 조정을 원할 땐 양자에게 한발씩 양보를 권하는 게 미덕이겠지만 누리과정 사태는 이 선을 넘었다. 명명백백 원인을 가려야 해법도 찾을 수 있는 상황이 됐다. 누리과정 사태는 박근혜 대통령의 무책임이 낳은 난리이다. 원인과 해법 모두 자신에게 있건만 대통령은 이를 모르거나 혹은 모른 체한다. 연두 기자회견에서 “아이들을 볼모로 정치적 공격 수단으로 삼고 있다”며 교육감들을 비판하는 걸 보면 자신의 책임을 모른 체하는 게 아니라 아예 망각한 듯하다.

                   

대통령은 후보와 당선인 시절까지는 무상보육에 대한 중앙정부의 역할을 인식하고 있었다. 공약집 1쪽에 실린 ‘국민 행복 10대 공약’의 두 번째 약속이 “확실한 국가책임 보육: 만 5세까지 국가 무상보육 및 무상유아교육”이다. 당시 누리과정 어린이집 몫이 교육청으로 이관될 것을 감안해 “3~5세 누리과정 지원비용 증액”(68쪽)을 재확인했다. 별도로 발표한 ‘재원 없이 공약 없다’ 제목의 재정공약 1쪽에선 ‘재원조달 3대 원칙’의 두 번째로 “지방재정 부담 충분히 감안한 재원조달”을 제시했다. 대선후보 TV연설에선 “국가 책임 보육체제를 구축하고 5살까지 맞춤형 무상보육을 실시하겠다”며 표를 호소했고, 당선인 시절 시·도지사 간담회에선 “보육사업과 같은 전국 단위로 이뤄지는 사업은 중앙정부가 책임지는 게 맞다”는 소신을 거듭 밝혔다. 교육부도 대통령의 뜻을 성실히 따랐다. 2015년은 누리과정이 모두 교육청으로 이관되는 해이다. 이에 교육부는 기획재정부에 제출한 2015년 예산요구안에 누리과정 어린이집 몫으로 2조2000억원을 편성했다. 어린이집을 떠맡게 된 교육청에 해당 비용을 지원하는 건 무상보육 국가책임 공약에 따른 당연한 조치였다.



여기까지다. 대통령이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는 시간이. 태도가 돌변했다. 교육부의 증액 요구안이 전액 삭감됐다. ‘누리과정 예산 편성은 교육청 소관이니 알아서 해야 한다’, ‘법률이 정한 내국세의 비율만큼 교육교부금을 교육청에 이전했으니 중앙정부는 책임을 다했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교육청이 이에 저항하자 작년 10월에는 지방재정법 시행령에 어린이집 누리과정을 교육청 의무지출로 못 박는 조항을 추가하며 교육청을 압박했다.


무리한 국정운영이다. 어린이집 누리과정을 넘기면서 예산은 제공하지 않는데 사업이 진행될 수 있을까? 작년엔 누리과정 중단은 막아야겠기에 지방채를 발행하는 쓴잔을 마셨지만 올해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고 교육감들이 나선 까닭이다. 법치국가에서 아무리 시행령을 고친들 교육교부금을 ‘교육기관 운영에 필요한 재원’으로 정의한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제1조)을 넘을 수 없다. 정녕 대통령이 시행령을 들고나온다면 우리는 상위 법에 따라 교육기관이 아닌 어린이집(보육기관)에는 교육교부금을 사용할 수 없다고 교육감들이 배수의 진을 친 배경이다.


대통령이 왜 망각에 의지하는지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는 ‘비정상의 정상화’를 누리과정에서 이루려면, 교육교부금을 어린이집에 사용할 수 있도록 법을 고치고, 어린이집만큼 교육교부금 교부율을 올려야 하건만 중앙정부에 돈이 없다. 교육청도 빚더미에 앉아있지만 중앙정부도 처지가 심각하다. 재정적자가 작년 46.5조원이고, 올해도 36.9조원으로 예상된다. 지출개혁, 지하경제 등에서 예산을 조달하면 좋겠지만 여기서 나올 돈은 제한적이고 당장 나오기도 어렵다. 빈약한 세입이 근본 원인이다. 2013년 기준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이 GDP 17.9%로 OECD 평균 25.1%에 비해 약 7%포인트 적다. GDP 1500조원을 적용하면 무려 한해 100조원이 부족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해법도 대통령의 공약집에 담겨있다. 공약집 349쪽엔 ‘복지지출 증가 등으로 재정수입 확대가 필요한 상황이므로 세입 확충의 폭과 방법에 대해 국민 의견을 수렴하는 국민대타협위원회를 설치하고 이를 국민대통합의 기회로 삼겠다’는 약속이 적혀 있다. 제발 공약집을 펴보기 바란다. 쪽수까지 적은 이유이다. 어려운 과제이지만 증세를 진지하게 이야기할 때이다. 대통령은 어떤 세목을 어떻게 조정할지 국민들과 토론하는 세금 논의의 장을 제안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