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만복 칼럼] "초등학생 수다가 정책이 됐다!"

2014. 5. 12. 17:26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내만복 칼럼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아래로부터 복지, '마을 복지'를 꿈꾼다

 

 

기현주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 서울시복지재단 복지공동체팀

 

 

하 수상한 시절에 마을과 복지이야기를 꺼내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고, 도대체 이렇게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복지국가의 꿈을 꾸는 것 자체가 가당하기나 한 일인가 싶다. 갑갑한 마음이 해갈되지 않아서 결국 지난 10일 노란 리본을 달고 안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런 마음으로 안산을 향해 내달려온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전국 방방곡곡의 2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안산으로 몰려들었다. 안산의 동료 시민들에게 이런 발걸음이 도움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통했는지 희생자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 그리고 유사한 참사를 겪었던 당사자들은 한목소리로 얘기한다.

'함께 슬퍼해 주셔서, 아파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렇게 참혹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잊힐 것이 두렵다는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온몸으로 듣고 나니 무기력하고 갑갑하기만 했던 마음이 다소 정리되는 느낌이다. 같이 울고, 같이 아파하면서 같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진상 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10일 안산 문화공원에 모인 2만 명의 시민들. ⓒ프레시안(김윤나영)


'마을 복지',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당사자의 목소리를 잘 듣고, 또 확성기가 되어 공감하는 사람들을 모으는 역할이 필요하겠다는 단상에서부터 마을 복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우리에게는 아직 지켜야 할 소중한 공동체가 있고, 공동체에 대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방법 또한 마을에 있다. 우리는 모두 이와 같은 참사의 당사자가 될 수 있고, 또 동시에 모두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함께하기 때문이다. 국가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다시 살리는 일도, 개개인의 삶을 다시 회복하는 일도 시작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각자의 삶에 충실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지 못한 '피치 못할 상황들'이 만들어낸 날카로운 칼끝이 다시 우리를 겨냥하고 있는 나날들이다. 그래서 이제는 '피치 못할 상황들'에서 벗어나는 작지만 누구나 실천해봄 직한 작은 시도들이 중요하다. 마을에서 함께 사는 삶에 대한 고민과 작은 시도가 바로 그 시작이다.

당사자가 될 것인가, 제삼자가 될 것인가

많은 사람이 '나는 사회복지의 당사자가 아니야'라고 생각한다. 국가로부터 생계비를 받지도 않고, 장애인도 아니고, 노인도 아니니 기초노령연금을 받고 있지도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떤 일에 당사자가 아니라 제삼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일은 내 일이 아니니까 관심에서도 멀어지고 나와 관계없는 일이 된다.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당사자에서 벗어나면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그런데 공동체의 일은 어떤가? 무엇 하나 내 일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후, '남 일 같지 않다'는 목멘 소리가 들린다. 공동체의 일은 이런 것이다. 남 일 같지 않은 일이다. 허망하게 유명을 달리하는 우리 이웃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나의 일상이 휘청거리는 것은 나도 당사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하지만 '당사자'가 되는 일은 여러모로 불편하다. 부당함에 항의해야 할 일도 많고, 해결을 위해 부단히 쫓아다녀야 하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상의 피치 못할 상황들에 처한 저마다는 당사자가 되기를 암묵적으로 거부한다. 이 또한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내가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제삼자의 입장이 되더라도 공동체에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가는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어려움에 처한 당사자의 상황을 뻔히 보고도 도움의 손길을 내지 않았다면, 당사자의 용기 있는 고백을 모른 체했다면, 그저 당사자의 어려움일 뿐이라고 치부해버렸다면, 함께 살아가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는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우리 사회의 정책과 제도에는 당사자의 목소리가 빠져있는 속 빈 강정이 많다. 혹은 당사자의 목소리를 반영하고는 있지만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빛 좋은 개살구인 경우도 많다.

물론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일에 관심을 두고, 모든 일에 관여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시각각 변화무쌍하고 복잡다단한 이런 세상에 어느 슈퍼맨이 그 모든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공동체에 속한 개별 우리의 삶이 결코 개별적이지만은 않다는 인식, 그리고 내가 속한 일상에서라도 공동체와의 연결고리를 가져보는 작은 실천이 나를 지탱해주고, 또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지속하게 해주는 힘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오히려 일상적이고 소소한 시도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아래로부터 복지를 기획하다

내가 일하는 서울시복지재단에서 마을 복지를 만드는 작은 시도가 막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5개 동네가 선정되었다. 이미 정해진 복지서비스가 아니라 사람들이 정말 필요하고 원하는 '복지'가 무엇인지 찾는 것부터 시작하자는 취지다.

우리나라 5000만 국민을 먹여 살리는 큰 정책으로서의 복지가 아니라 우리 동네 사람들이, 또 내가 안심하고 동네에서 생활할 수 있으려면 어떤 것이 필요한지부터 찾아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취지를 살려 기획한 것이 바로 복지서비스 당사자가 서비스의 생산자, 기획자, 진행자, 공급자가 되는 동시에 서비스 소비자이기도 한 복지 생태계를 조성하는 사업이다.

1~2개 동 단위의 소규모 지역을 중심으로 복지 활동가들이 거점(지역명을 따서 'OO 마을살이'라고 부른다)을 만들고, 시민을 직접 만난다. 시민 개개인이 갖고 있던 마을에서의 복지 욕구를 듣고, 비슷한 욕구를 가진 시민들을 서로 만날 수 있게 돕고, 또 가능하면 마을 안에서 복지 욕구를 해소할 방법을 찾고 지원한다. 즉, 시민의 개별 욕구를 사회적 필요로 전환하는 일이다. 

기존의 복지 정책이 전문가 중심의 하향식(top-down) 기획이었다면, 마을살이가 추구하는 방법은 시민 중심의 상향식(bottom-up) 기획이다. 현재 강서구 화곡본동, 용산구 보광동, 영등포구 영등포동, 은평구 신사동, 도봉구 쌍문동에 상향식 복지서비스 발굴과 개발을 위한 작은 시도가 진행 중이다.

각 마을살이에는 지역 복지분야 전문가로 지역 활동 경험이 풍부한 활동가와 공공부문에서 사회적 활동을 경험하고자 모인 청년 혁신 활동가가 3~5명으로 팀을 이뤄 활동하고 있다. 활동가들은 마을주민을 만나고, 주민들이 마을에서 하고 싶은 공공활동을 돕는 역할을 한다.

봉제산 공동텃밭, 마을 복지의 시작

강서구 화곡본동에는 '봉제산'이라는 동네 뒷산이 있다. 봉제산은 놀이터이자, 운동장이자, 휴식공원이기도 하다. 봉제산 공터에 몇 년 전 132제곱미터(40평) 남짓 하는 작은 텃밭이 조성되었는데, 공동텃밭이라고 한다. 봉제산을 드나들던 주민 한 사람이 ‘공동텃밭이니 주민들이랑 함께 경작하는 거겠지’ 싶어 경작할 사람을 모은다면 꼭 참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경작을 같이하자는 모집공고는 붙지 않았다. 아쉬웠다. 마을사람들이랑 공동경작을 하고 수확물도 같이 나눠 먹는 꿈을 꿨는데 기회조차 없었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났다.

그러던 중 화곡 마을살이를 만났다. 활동가들과 마을 얘기를 하다가 봉제산 공동텃밭 얘기를 하게 되었다. 마을살이 활동가들과 구청의 공원 녹지과 담당자를 만나면서 공동텃밭에 마을주민이 참여하는 기획을 얘기했다. 몇 차례 논의 끝에 봉제산 공동텃밭을 마을주민 중 원하는 사람들이 공동 경작하는 '공동체 경작'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참여할 이웃을 모으고, 텃밭에 대한 기본교육도 받고, 시농제를 하면서 공동경작을 드디어 시작했다.

주민 한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시작해서 비슷한 생각을 하던 주민들을 모으고, 마을의 공유지인 텃밭에서 공동경작을 하고 경작물을 이웃과 나누게 된 것이다. 봉제산 텃밭에 모인 주민들은 밭을 일구고, 퇴비를 뿌리고, 씨앗과 모종을 심으면서 서로의 삶을 나누고, 마을에서 함께 키울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 경작물을 마을의 다른 이웃과 어떻게 나눌지를 벌써 이야기한다. 공동텃밭을 매개로 마을복지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실제 화곡본동의 봉제산 공동텃밭은 주민이 발의한 마을복지 의제가 실현되고 있는 재미난 사례다.

일상적이고 소소한 시도를 경청하라

용산구 보광동에는 보광초등학교가 있다. 재개발 지역이라 아이들이 놀 공간이 마땅하지 않던 터라 보광 마을살이는 1년 사이에 아이들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보광 마을살이 활동가들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무리 주민을 만나는 공간이라고 해도 기본 업무도 해야 하는데,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마을살이 공간을 휘젓고 다니니 여러 어려움이 생겼다.

활동가들은 고민 끝에 아이들과 직접 얘기해보기로 했다. 아이들이 마을에서 하고 싶은 것들은 무엇인지, 마을의 공유공간인 보광 마을살이를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공유할 것인지를. 그렇게 보광동 어린이회의가 시작된다. 어린이도 마을의 한 주체로 마을에서 발언권을 가지는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아이들은 동네에 놀 공간이 없는 문제나 여기저기 버려지는 쓰레기 문제, 동네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마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소소한 수다에서 시작되었다. 수다를 통해 마을을 고민하는 초등학생들이라니. 

세월호 참사가 있고, 각 마을에서는 준비하고 있던 5월 행사를 모두 취소하거나 연기하였다. 용산동 보광마을에서도 보광초등학교 아이들과 준비하던 '씨앗 폭탄'을 '희망 씨앗'으로 변경해서 추모와 애도의 마음을 나누도록 행사 성격을 바꿔 진행했다. 남의 일이 아니었기에, 아이들과 상의한 끝에 변경한 것이다. 이 아이들이 생각하는 마을은, 공동체는 어떤 모습으로 커 나갈지 기대될 수밖에. 

이외에도 몇 명의 주민이 사비를 털어 진행하던 마을축제를 보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공식화하는 일도 있었고, 개인 공작소를 운영하는 마을 예술가들이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마을의 아이들에게 예술체험전을 열어 소통하기도 하였다. 새로 이사 온 동네라 아는 사람이 없어 외롭던 애기 엄마는 마을의 엄마 모임을 만나면서 삶의 활력을 새롭게 찾기도 한다. 아이들의 통학로 안전 문제를 이야기하는 부모의 모임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영어학원을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과 원어민 수업을 진행하는 외국인이 마을활동을 하기도 한다. 

우리 동네에 이웃이 있구나!

이렇게 마을 활동을 접한 주민들은 '우리 동네에도 이웃이 많구나, 텃밭을 경작하고 싶은 사람이 많구나,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싶은 사람들이 있구나, 같이 놀 친구가 있구나, 내 아이를 맘 놓고 맡길 이웃이 있구나, 얘기할 사람들이 있구나'라고 얘기한다.

또 이렇게 마을활동을 시작한 활동가들은 '나도 주민과 다르지 않구나, 주민의 힘은 정말 대단하구나, 당사자가 역시 가장 잘 아는구나'라고 얘기한다. 이렇게 마을살이의 활동은 숨어있는 주민의 힘을 발견하고, 마을이라는 공공영역에서 그 힘이 발휘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또한 복지 활동가들에게 마을은 주민의 힘, 지역의 힘을 몸소 체험하는 소중한 일터이기도 하다.

얼마 전, 보광마을에서 활동하는 대공이 토종상추 모종 하나를 건네 왔다. 디저트 푸딩이 담겨있던 플라스틱 용기에 구멍을 뚫어 상추 모종의 화분으로 예쁘게 업사이클링했다. 자그마한 상추 모종에 뿜어 나오는 생명의 힘이 놀라울 정도다. 마을에서 만나는 주민의 모습과 똑 닮았다. 소소하고 일상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큰 힘이 발휘되는 주민의 모습과 말이다. 마을살이라는 작은 시도는 보통의 사람들이 보통의 일상에서 공공의 가치를 찾고 회복할 기회를 함께 만드는 데 의의가 있다. 처음 시도는 아주 소소하고 일상적이지만, 이런 시도가 모이고 모이면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정책이 되기도 한다는 상상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작지만 소중한 경험들이 서로에게 쌓이면서, 모두가 공동체의 당사자로 살아가는 일이 일상이 되는 상상은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이 될 것이다.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