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만복 칼럼] 부자증세론이 놓쳐 온 것은?

2013. 8. 28. 12:47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내만복 칼럼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세금 파동의 교훈, 다시 사회연대전략을 생각한다

 

 

김수민 구미시의회 의원 녹색당

 

 

2011년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를 위시한 각종 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1대 99'라는 새로운 전선의 구도를 실어 날랐다. 기존 '20 대 80' 시절보다 더욱 심해진 양극화 현실을 담으면서 피해 대중의 범위를 확대하고 지배층의 규모를 최소화해 '왕따'시키는 이 구도는 저항 운동과 변혁 담론을 매혹시켰다.

과연 99는 동질적인가?

2012년 총선 당시, 내가 사는 경북 구미 지역에 출마한 야권 후보의 슬로건에도, 동네 번개시장에서 그를 지지하던 내 연설에도, '1% 대 99%'는 후크송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내가 유보했던 혹은 모른 체했던 질문에 마주 서 있다. 정말로 99%는 다 같은 99%일 수 있는가?

박근혜 정부가 세법 개정안 수정안을 내놓았다. 애초 원안에 대해 서민 증세라는 비난이 제기되자 추가 세 부담자의 규모를 줄이는 내용의 수정안이다. 그리고 야당은 처음에 꺼내든 '세금 폭탄론'을 슬슬 집어넣었다. "여야가 한걸음씩 물러났고, 그게 바로 정치의 진수"라는 긍정적인 논평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당초에 나온 세제 개편안 논란 과정에서 들춰지고 찔려버린 한국 사회의 허는 결코 숨길 수 없다.

우리나라 소득세는 근로자의 총급여에서 다양한 소득 공제를 빼고 난 소득, 즉 과표 소득을 기준으로 세금이 부과된다. 이러한 소득 공제는 총급여에서 세액을 산정한 다음 거기서 일정한 비율로 세금을 환급해주는 세액 공제보다 고소득자에게 유리하고 저소득자에게 불리한 제도이다.

소득세 개편이 세금 폭탄이면, 자녀장려세제는 '폭탄 제거'?

이번 소득세 개편안의 핵심은 소득 공제를 세액 공제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이 안에 따라 세금을 더 내는 이는 근로 소득자의 상위 28%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도 공제 제도를 바꿔 실효세율을 건드리는 낮은 단계의 증세다. 나머지 72%는 세액 공제 전환으로 세 부담이 줄어든다. 여기에 워킹 푸어 지원금인 근로장려세제의 확대, 저소득층 가구 자녀에게 주어지는 자녀장려세제 도입 등을 감안하면, 최종적으로 전체 근로소득자 중 23%가 세금을 더 내고 77%가 감세 혜택을 본다. 여기에 '기타 소득세'라는 우회로를 택했지만 종교인 과세도 포함되어 있다.

연봉 8000만 원인 사람이 1년에 33만 원쯤 더 부담하는 것이 민주당의 처음 논리대로 세금 폭탄이라면, 근로장려세제 확대나 자녀장려세제 도입 그리고 종교인 과세 시작은 '폭탄 제거'라고 불러야 되는가?

"세금 더 내기 싫다"는 반응이야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돈은 일단 아깝기 마련이다. 그 세금이 어떻게 쓰일지 불투명하고 역대 한국 정부 모두 국민들에게 불신을 심어주기 바빴으니 이 불만은 제법 사회적인 명분도 갖추고 있다.

다만 나는 "부유층과 대기업은 증세하지 않았기에 중산층(과 서민)이 세제 개편안의 피해자"라는 '논리적'인 반항에 의구심을 품는다. 아울러 극소수가 내는 종합부동산세를 '세금 폭탄'이라고 규정한 수구적 정당과 언론의 작태를 그대로 떠안아, '세금 폭탄론 2.0'을 빚어내고 이를 국정원 선거 부정 규탄과 묶어 대정부 투쟁으로 치장했던 이들로 인해 이맛살을 찌푸렸다.

'봉급쟁이가 봉이냐?' 구호의 위험성

세제 개편안에서 추가 세 부담을 하는 봉급쟁이는 소수고, 그 안에서도 부담 수준이 천차만별이다. 명백한 누진적 증세다. 그런데도 단지 상위 1%가 아니라는 이유로 고소득자마저 '봉급쟁이가 봉이냐'는 획일적 구호에 숨어 버리고, 1%의 탐욕과 무책임은 그 이외 사람들의 태만에 알리바이로 쓰인다. '부자 증세'가 '부자 증세를 중심으로 보편 증세를 하자'는 뜻이었는지, 아니면 '부자만 증세하자(나만 아니면 돼)'는 의미였는지도 헷갈릴 지경이다.

복지를 확대하고 보편적 복지까지 가려면 막대한 복지 재정이 필요하다. '세출 구조 개혁'이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 요원하다. 가정 살림이 쪼들릴 때 지출 내역을 조정하는 동시에 수입 확대를 꿈꾸는 것을 떠올려보라. 특별히 정부 재정이라고 그와 다르랴. 복지 확대 내지 보편적 복지에는 세수 추가 확보가 필수다. 잘못 쓰이거나 줄줄 새는 재정이 없어지기 전까지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여기에 합의하는 사람이라면, 부자 증세와 보편 증세에 경직되게 선후를 매기지 말아야 한다. 부자 증세만으로는 복지 확대에 제약이 있거니와, 그 부자 증세 또한 보편 증세와 결합될 때 꽃피기 쉽다. 2004년 총선 민주노동당이 내건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 미처 담지 못한 내용을 이제 말해야 한다.

"전두환도 추징금 안 내는데 왜 나만 그러느냐" 한다면?

교통법규 위반으로 단속당할 때 "전두환도 추징금 안 내는데 왜 나만 그러느냐"며 과태료를 미납하는 국민들이 수두룩했다면, 전두환 일가에 대한 공분과 응징에 그다지 힘이 실리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전두환이 끝내 추징금을 덜 내더라도, 전두환처럼 살지 않는 대다수 양심적인 국민이 있어야 세상이 돌아간다.

 

시민단체들이 지난 5월 16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 앞에서 '추징금 징수'와 '부당 경호 중지'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프레시안(최형락)

동네 노인 잔치에 후원금을 내지 않는 동네 부자가 끝내 돈을 내거나 최소한 빈축이라도 사고 어쨌든 노인 잔치가 무난히 치러지는 이유도 누군가는 지갑 열지 않는 부자 핑계를 대지 않고 공양하기 때문이다. 공제 제도를 개편해서 봉급쟁이끼리라도 하후상박 원리로 세 부담을 조정한다면, 부분적으로나마 형평성을 제고했다는 사회적 이력이 축적되고, 이를 토대로 부자와 대기업에 증세를 압박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내(우리)가 되를 낼 테니 나보다 여유 있는 네(너희)가 말을 내라"고 요구하고, 그것이 수용되지 않을 경우 "우리끼리라도 십시일반해서 잘 꾸려가겠다"고 분개 반 자신감 반의 일성을 토해낼 수 없는 사람들이 되고 만 건 아닐까. 그랬던 경험이 별로 없어서 써먹을 방법을 모르거나, 했더라도 이치를 깨닫고 깨달음을 사회화한 적이 드문 탓이다.

우리가 '무상 급식'에서 얻어야 할 것은 사회 연대

최근 몇 해 동안 복지 담론은 지지세를 넓혀 왔고, 뚜렷한 복지 지향 정부를 만들지는 못했으되 기존 집권세력이나 유력 정당의 태도를 바꿀 정도에는 이르렀다. 그러나 그동안 정작 복지 사회의 핵심인 상호 협력 혹은 사회 연대를 갖추는 데는 실패하지 않았는지 되돌아 볼 때가 왔다.

특권층 및 상류층을 압박하는 전략의 원료는 사회 연대 의식과 그에 따른 집단 행동이다. 허나 한국 사회에서는 복지를 향한 열망조차 (개인주의도 아닌) 사인주의를 쫓고, (사회나 공동체를 제치고) 국가주의에 기대고 있었다. "당신이 안 내면 나도 안 낸다." "나를 건드리지 말고 위에서 좀 알아서 잘 해주라." 학교 무상 급식 정책도 혹여 '교육의 탈상품화'보다는 '돈 안(덜) 내기' 차원의, 복지 확대보다는 감세 비슷한 부담 축소로 비쳐 지지를 받지 않았는지 성찰해볼 일이다.

그런데 근래 시민들은 절전에 대해서는 세제 개편안 논란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전체 전력 중 산업용이 절반을 뛰어넘고 대기업은 전기 요금에서도 특혜를 받아왔지만, 많은 시민들은 "대기업이 아껴야지 내가 왜?"라고 고개 돌리지 않고 절전에 동참했다. 블랙아웃에 대한 위기감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아낀 전략량이 과연 얼마인지보다 시민들이 시스템의 중단을 자기 일로 여겼다는 것이, 이 시민들은 대기업 전기 요금 인상을 압박할 당당함을 쌓았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증세를 향한 저항은 정부 재정이 제 것이라 여겨지지 않았던 탓이 크고, 사회 연대 의식의 부족은 '직접 사회 경영'의 의지를 북돋을 만한 계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추가 납세에 거부감을 표하는 상당한 시민들이 (엄청난 비판에 직면해 있는) 민간 보험료 같은 것은 꼬박꼬박 잘 내고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은 멀고 민간 보험은 가깝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런 체감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저 정부 정책에 관심을 가지라고 계몽하는 식으로는 안 된다.

직접 손에 쥘 수 있는 영역을 조성해야 한다. 이를테면 협동조합의 조합원은 무턱대고 출자금이나 조합비를 인하하는 것을 부담의 축소랍시고 반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조합의 재정을 줄이고 자신에게 손실로 돌아온다는 점이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직접 경영의 체험이 감세나 증세 회피를 제 이익으로 계산하는 시민들이 사고를 전향할 수 있는 길이다.

안타까운 추억, 사회 연대 전략

그런 의미에서 정규직 노동자 등 여력 있는 사람들이 솔선하여 정부와 자본을 압박해 국민연금 사각지대를 해소하자던 '사회 연대 전략'을 다시 생각한다. 2007년 당시 민주노동당이 핵심 사업으로 추진했지만 "정부와 자본은 놔두고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강권한다"는 반발로 좌초되었던 그 구상 말이다.

당시 이를 접했던 나는 사회 연대 전략의 실현 여부를 떠나 그것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의의가 있다고 확신했다. 조금은 더 여유 있는 쪽이 더 어려운 쪽을 대변하고, 그럼으로써 특권과 이윤을 챙기는 쪽을 압박하는 길이었다. 또 '남 핑계 대지 않고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보겠다'는 건강한 마음가짐의 발로였다.

우리는 가장 특혜를 많이 받고, 가장 탐욕스러우며, 가장 문제가 많은 집단, '1%'를 향한 항의에 익숙하다. 그러나 그쪽으로 책임을 밀기'만' 한다면, 그 반작용으로 자신도 사회와 공공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러고 나서 남는 건 더 멀어진 대상에 대해서, 어떻게 건드려보지도 못한 채 소리 지르는 일뿐이다. 사회 연대 전략의 좌초는 당시 한국의 노동 운동과 진보 정당 운동의 무기력을 입증하는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자!

스스로 형편이 넉넉하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목소리라도 낼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묻는다. 비슷하거나 더 약한 사람들과 연대하고 그럼으로써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있는 자들을 압박하며 모든 이를 위한 복지를 여는 방도는, 그중에서도 내(우리)가 직접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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