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만복 칼럼] 다문화사회를 만드는 일, '여기'에서 출발한다

2021. 6. 25. 15:51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내만복 칼럼

[내가만드는복지국가]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엉망 이주인권활동가

 

다문화 청소년 (출처: 한겨레 신문)


어릴 적 다니던 주일학교에서 캠프를 할 때 즐겨 했던 놀이 중 하나이다. 술래가 된 사람이 불특정 누군가의 앞에 다가가서 "당신은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까?"고 묻는다. ○○○○은 다양하게 변형할 수 있다. 가령, '안경 쓴 사람, 검은색 양말을 신은 사람, 귀걸이를 한 사람, 줄무늬 옷을 입은 사람, 팔짱 낀 사람' 등. 그러면 질문을 받은 사람은 "네" 혹은 "아니오"로 대답한다. "네"라고 하면 양쪽에 앉은 사람과 술래가 동시에 일어나 재빨리 자리를 바꿔 앉는다. "아니오"라고 한다면, 질문자가 다시 묻는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를 사랑하십니까?" 대답하는 방식은 ○○○○에 들어갈 말을 바꾸면 된다. "○○○○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이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모두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새 자리를 찾아 떠난다. 그러다 자리를 못 찾은 사람이 술래가 된다. (자리는 전체 인원수 –1) 간혹 이 놀이를 하다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고백하는 용감한 친구도 있었다. 나는 매번 '혹여 내가 술래가 되면 뭐라고 할까?' 긴장했다. 

 

"저는 한국사람을 사랑합니다." 

 

누군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하자. 그 공간에 있는 모두가 일어났을까? 한 명도 빠짐없이 일어나 새자리를 찾느라고 몸을 부딪치고 산만한 광경이 펼쳐질까? 만약에 일어나지 못하고 멀뚱히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순간 그는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본의 아니게 질문자는 차별자가 된다. 속으로 '아! 여기 있는 모두를 일어나게 해서 정신없이 만들어야지.' 꾀를 내었던 참이라면 실패다. '과연 한국사람은 누구인가?' 2차 질문을 해보자. 나는 교육 활동을 통해 만난 참여자들에게 종종 '한국사람은 누구일까요?'라고 물어본다. 초등학생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집단을 만나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하다. '한국국적을 가진 사람,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 비교적 머리카락이 검고 눈동자가 검은 사람, 김치를 잘 먹는 사람,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 언뜻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한국사람'에 속하는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 경계는 분명하다. 넘지 못할 선! 지난 6월 첫 주, 비슷한 시기에 세상에 알려진 두 가지 뉴스는 이를 방증한다. 

 

#1. 한국 육상 단거리 유망주 비웨사 다니엘 가사마(18세 원곡고)가 200m 개인 최고 기록을 세우며 우승했습니다. (중략) 비웨사의 기록은 아직 한국 고등부 기록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의 가파른 성장세에, 국내 육상계는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비웨사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인입니다. 콩고에서 태어난 비웨사의 부모는 한국에서 비웨사를 낳았습니다.(☞ 관련 기사 : <SBS뉴스> 6월 5일 자 '비웨사, 육상 고등부 200m 개인 최고기록으로 우승…21초43') 

 

#2. 전남의 한 중학교 운동부에서 동급생 간 폭력과 금품 갈취가 있었다는 신고가 접수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피해 학생은 투병 중인 아버지를 생각해 학교폭력 고충을 털어놓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중략) "너희 엄마 베트남 사람이라고 친구들에게 소문내겠다"고 괴롭혔다는 것. 결국 A군은 올해 4월 말과 5월 초에는 2차례에 걸쳐 5만 원을 빼앗겼다고 한다.(☞ 관련 기사 : <이투데이> 6월 9일 자 '폐암말기 아빠 걱정에, 학폭 참은 중학생…가해자들 "너네 엄마 베트남 사람" 협박도') 

 

두 기사 모두 주인공이 이주배경을 가진 청소년 운동선수라는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한국어를 하고, 한국 학교에서 받아왔다. 비웨사는 그의 노력과 성과로 한국인으로 인정받고 있으나,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한 학생은 엄마의 고향이 다른 나라라는 이유로 왕따가 되었다는 것이 차이다. 이 뉴스를 본 시민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비웨사를 정말 한국사람으로 인정할까? '다문화가정 자녀의 왕따 문제는 늘 있지 뭐…' 하며 넘어갈까? 만감이 교차하는 때에 오래전 모 기업이 만든 공익광고가 떠올랐다. 

 

"베트남 엄마를 두었지만 당신처럼 이 아이는 한국인입니다.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고 세종대왕을 존경하고 독도를 우리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축구를 보며 대한민국을 외칩니다. 20살이 넘으면 군대를 갈 것이고 세금을 내고 투표를 할 것입니다. 당신처럼. 다문화가정을 지원하는 일 내일의 행복을 위한 일입니다."

 

흑백필름으로 구성된 이 공익광고는 분명 다문화사회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강화시키고,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의미로 기획되었을 것이다. '우리사회에 행복 하나 더하기'라는 부제! 얼핏 듣다 보면 그럴싸하다. 한 문장씩 톺아보자. 여기서 말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1단계, 그도 대한민국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 땅'의 '우리'도 역시 대한민국 사람을 뜻한다. 베트남에 외가가 있고 친척들과 왕래가 활발하여 베트남을 좋아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대한민국'을 외쳐야 한다. 한 남자 성인이 나이지리아 배경을 가진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며 "○○야, 오늘 축구하는데 어느 나라 응원할 거야?"라고 묻자, "잘하는 나라요!"라고 물어서 통쾌했다는 활동가의 이야기가 선명하다. 

 

군대? 여기서는 장애가 없고 성소수자가 아니라는 것이 전제된다. 그런데 실제로 이주배경 청소년 중 남성들이 성장하여 징병제로 군대에 가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군 입대를 하고 싶어도 대한민국으로부터 거부당했던 때가 있었다. 국가 안보가 이유였다. 인종, 피부색으로 외관상 명백한 혼혈인은 군 복무가 면제되었다. 국방부가 2009년 12월 한국 국적이면 병역의무를 지도록 병역법과 시행령이 개정되었다. 2011년부터 소위 '다문화장병'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군 생활 적응을 이유로 지휘부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는데 지나치다면 오히려 문제이다. 관심사병이 되어 온갖 주목을 받고, 예외적인 휴가를 받는다면 다른 구성원들은 역차별을 운운할 것이다. 

 

'특별하다는 구분'이 아니라, 소수종교 등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최근 채식주의, 무슬림 학생들, 장병들을 위해 급식에 '맞춤 식단'으로 비건(동물성 식품을 섭취하지 않는 엄격한 채식) 식단을 제공하는 방침도 생겼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고, 점차 다양성을 존중하는 식품들이 시중에 선보이고 있다. 

 

다시 광고로 돌아가자. 이 광고에서 가장 차별적인 문장은 다름 아닌 첫 문장이다. '베트남 엄마를 두었지만,' 베트남이 고향인 엄마는 그 출신 자체로 부정을 당했다. 그래도 아이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대한민국 사람에 대한 기준이 획일적이다. 누군가는 세종대왕이 아닌 다른 사람을 존경할 수도 있으며, 남성이 아닌 여성 위인을 존경할 수도 있다. 김치 없이 밥을 먹어도 혹은 매워서 김치를 절대 먹지 못해도 같은 식탁에서 존중받아야 한다. 나아가, 오늘 내가 앉은 식탁 위에 올라오는 채소가, 김, 생선이 누구의 손을 거쳐 왔는지도 생각해보자.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일손 부족이 심각한 농어촌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의 먹거리 생산을 책임지고 있다는 현실을! 대한민국을 응원하면서 베트남도, 필리핀도 함께 응원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가능해야 한다.

 

시민사회단체들은 '다문화'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여서는 안 된다고 숱하게 강조해왔다. 내가 원치 않는 사이에 '다문화'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대상화하고, 시혜 위주의 온정주의적 관점으로 다가서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이 광고는 10년도 더 전에 만들어졌고, 감수성이 달라진 지금에서는 다른 버전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어떤 이웃과 살고 계십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진정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내 곁에 있는 이웃이 어떤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또 그 차이로 인해 차별받지는 않는지 살필 수 있어야 한다. 다문화사회를 만드는 일은 거기에서 출발한다.



출처: 다문화사회를 만드는 일, '여기'에서 출발한다

 

다문화사회를 만드는 일, '여기'에서 출발한다

어릴 적 다니던 주일학교에서 캠프를 할 때 즐겨 했던 놀이 중 하나이다. 술래가 된 사람이 불특정 누군가의 앞에 다가가서 "당신은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까?"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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