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만복 칼럼] 어린이 병원비 문제는 생존권 문제다

2020. 9. 24. 12:39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내만복 칼럼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어린이 의료비 문제, 당사자와 함께 연대의 길로…

 

 

이해령 세상을바꾸는사회복지사 회원

 

 

아동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 활발히 전개된 '어린이 병원비 국가보장 운동'이 어느새 5년 차에 접어들었다. 많은 사회운동이 등장하고 퇴장하는 와중에도 5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자리를 굳게 지켜왔다. 질병에 맞서 싸우는 아동, 가족과 함께 일했던 사회복지사이자 한 아이의 엄마로서 감사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이유다. 운동이 더욱 오래 빛나기를 바라며 지난 5년의 성과를 짚어보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어린이 병원비 국가보장 운동, 괄목할만한 성과 거두어

 

2016년 2월, 어린이단체, 사회복지사단체, 복지시민단체 등 26개 단체가 모여 '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추진연대'(이하 어린이연대)를 결성했다. 어린이 병원비 국가보장 운동은 아동의 치료비를 모금이나 민간보험에 의존하지 말고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어린이연대는 유엔아동권리협약 제 24조 2항을 근거로 국가가 아동의 치료 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원만한 보건 의료 서비스 이용을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했다. 국민건강보험 재정 누적 흑자의 일부를 재원으로 삼아 '어린이 병원비 100만원 상한제'를 도입하자는 매우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했다.

 

어린이연대는 각종 정책 제안 활동, 국민 서명 운동, 홍보 활동 등을 활발히 전개한 결과 2017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를 비롯한 다수의 후보로부터 '어린이 병원비 100만원 상한제'에 대한 동의를 끌어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는 정책협약을 맺었던 은수미 성남시장 후보가 당선되면서 2019년 7월 지자체 최초로 성남시에 18세 미만 어린이 병원비 100만원 상한제가 도입되는 성과도 얻었다. 운동이 본격화된 지 채 3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 2016년 10월 4일 어린이 병원비 국가 보장 국민 서명 운동 출범식. ⓒ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추진연대

 

 

또한 '문재인 케어'에도 어린이 병원비 국가보장 운동의 제안 내용이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 6세 미만 아동에게만 주어졌던 입원치료비 본인부담금 면제제도가 확대되어 2017년부터는 6세 이상 15세 이하 아동에 대해서도 입원치료 건강보험 요양급여 본인부담률이 5%(차상위계층의 경우 3%)로 줄어들었다. 1세 미만 영유아에게는 외래 진료비에 대해서도 본인부담률 5~20%가 적용되는 방향으로 지원이 확대되었다. 조산아·저체중 출생아의 경우 외래 본인부담률이 10%에서 5%로 조정되었을 뿐 아니라 적용 기간이 출생 후 5년까지로 연장되었다. 열거한 본인부담률 경감 제도는 문재인 케어의 일환으로 건강보험 급여 적용 항목이 확대되면서 비로소 실효를 거두게 되었다. 

 

드물지만 급여 중 본인부담금 자체가 많이 발생하거나 선별·예비급여, 비급여가 고액으로 발생하는 일도 있다. 급여 중 본인부담금의 경우 건강보험 본인부담금 상한제도를 통해 초과 발생분을 환급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책을 마련하고 있으며, 정부와 지자체 차원에서도 별도의 의료비 지원 제도를 마련해 해결방안을 제공하고 있다. 중앙정부의 대표적인 의료비 지원 제도라 할 수 있는 긴급복지 지원제도, 재난적 의료비 지원제도는 소득·재산 기준에 따라 의료비를 지원하는데 아동도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신생아를 대상으로 하는 선천성 대사이상 검사비 지원사업, 조산아·저체중 출생아 및 선천성이상아 의료비 지원사업, 소아 암환자 의료비 지원사업, 희귀·난치성질환 의료비 지원사업 등도 빼놓을 수 없다. 각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자체 긴급지원 사업(서울형 긴급지원, 경기도형 긴급지원 등)에서도 소득·재산 기준에 따라 의료비, 간병비 등을 지원하는데 이 사업 역시 아동도 대상이 될 수 있다. 민간에서도 의료비 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제 아동은 다양한 정책과 제도적인 경로를 통해 의료비를 경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건강할 권리'를 넘어 '잘 아플 권리'를 보장해야 

 

하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앞에 있다. 사회적인 노력이 제도 개혁으로 이어지면서 과거와 비교하면 경제적 부담은 상당 부분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질병으로 고통받는 아동과 가족은 존재한다. 의료비 문제 외에도 학업 문제를 포함한 다양한 심리사회적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재활치료를 받아야 하는 경우나 희귀·난치질환과 같이 장기간의 후속 치료가 필요한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질병에 맞서 싸우는 아동과 가족의 호소는 파편화되고 타자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국가와 민간에서도 주로 의료비 문제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투병 중인 아동과 가족을 '대상'으로만 상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이들이 여전히 고통받는다는 점에는 누구나 동의하지만, 고통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증상을 인지한 순간부터 진단 및 치료단계, 치료 종료 및 지역사회 복귀에 이르는 전 과정을 아동과 가족 당사자의 시각에서 재구성하는 작업이 절실하다. 슈바이처(Schweitzer)는 "모든 환자는 내면에 자신만의 의사가 있다(Every patient carries her or his own doctor inside)"고 말했는데, 아동 환자 역시 다를 바 없다. 투병 중인 아동과 가족을 주체로 인정하고 내면의 목소리를 복원함으로써 '병원비'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고통을 당사자 시각으로 가시화해야 한다.

 

사회단체 활동가이자 페미니스트인 조한진희는 저작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통해 '건강할 권리'를 넘어 '잘 아플 권리' 즉, 질병권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는 아동의 건강 문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까지 '어리고 아픈 사람'이라는 정체성과 '건강해질 권리'라는 프레임 속에 가둬지면서 '잘 아플 권리'는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 어린이연대의 활동이 앞으로 망라해야 할 지점이 바로 여기다. 아동과 가족을 어린이 병원비 국가보장 운동의 주체로 포섭하여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잘 아플 권리'를 주장하도록 외연을 확장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병원비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활동이지만 아동의 생존권 문제를 다루는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운동이라는 점에서 아동과 가족을 주체로 삼는 문제는 중요하고 시급한 사안이다. 

 

최근에는 의학계마저도 환자를 의사결정의 주체로 끌어들이는 방안에 관한 논의가 한창이다. 당사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자연히 '잘 아플 권리'가 무엇이며, 어떻게 행사될 수 있을지에 관한 해답을 찾게 될 것이다. 인도의 페미니스트이자 문예학자 스피박(Spivak)은 억압받고 차별당하는 이들의 권리를 논할 때 고통받는 당사자가 '말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동의 잘 아플 권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이 질문은 유효하다. 질병에 맞서 싸우는 아동과 가족은 말할 수 있는가? 

 

 

연대를 통한 새로운 항해 

 

배진교 정의당 의원은 지난 6월 18일 18세 미만 어린이 병원비 100만원 상한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국민건강보험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제출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어린이 병원비 국가보장 운동은 또 하나의 큰 성과를 얻게 될 것이다.

아동의 생존권은 보편타당한 권리로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진영논리에 희생되어서도 안 된다. 과거의 경험에서 배운 바와 같이 학자나 전문가가 전면에 나서는 방식은 파급력이 클 수는 있으나 논의를 추상화하여 예상치 못한 논쟁으로 흘러갈 위험성도 그만큼 크다. 당사자가 주체가 되어 당사자의 목소리로 주장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 가장 구체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강력하고 안전하다. 아동의 생존권을 정치의 문제로 오인하는 이들에게까지 연대를 제안할 수 있는 권한 또한 다름 아닌 당사자에게 있다. 어린이 병원비 국가보장 운동은 이제 당사자와 함께 더 큰 사회적 연대를 향해 새로운 항해를 시작해야 한다. 

 

난항이 예상되지만, 국가보장을 반대하는 자유·보수진영과도 연대할 수 있는 희망은 있다. 자유주의 사상가 로티(Rorty)는 저작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Contingency, Irony, and Solidarity)>에서 잔인성이 줄어든 사회, 고통과 굴욕이 최소화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과제임을 역설했다. 증대된 감수성을 바탕으로 공감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잔인성과 고통과 굴욕이 사라질 날을 희망하며 노력하는 사람이 진정한 자유주의자라고 보았다. 로티는 자유주의자들에게 연대는 탐구되거나 반성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 즉, 낯선 사람들을 고통받는 동료로 볼 수 있는 상상력을 통해 성취되고 창조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다. 질병과 맞서 싸우는 아동과 가족의 목소리는 자유주의자들에게도 공감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라면 결국 본성과 어휘와 신념을 떠나 아동과 가족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아동 생존권 보장을 향해 새로운 항해를 함께 하는 '동료'로서 말이다. 자유주의 사상가 로티에게서 어린이 병원비 국가보장 운동의 가능성을 다시금 확인하는 '우연'과 '아이러니'를 마주한다. 

 

 

* '내가만드는복지국가'는 의제별 연대활동을 통해 풀뿌리 시민의 복지 주체 형성을 도모하는 복지단체입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92315474629682#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