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복지 정치의 지역화

2015. 10. 28. 14:08내만복 활동(아카이빙용)/언론 기고

오건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아버지의 꿈이 복지국가였단다. 이를 자신의 소명으로 삼아 대통령이 되었는데, 어찌 아버지의 뜻과 거꾸로만 간다. 당선 직후부터 복지 공약을 뒤집더니 이번엔 멀쩡한 복지를 없애라 한다. 유사·중복 딱지를 받고 중단 위기에 놓인 지자체 자체복지 이야기다.

우리나라 복지사업의 대부분은 중앙에서 결정된다. 중앙정부가 사업을 설계하고 국고보조금을 보내면 지자체가 대응 예산을 더해 집행한다. 이와 별개로 지자체가 스스로 예산 전액을 조달하는 자체복지도 있다. 중앙정부가 주관하는 복지가 빈약해 여전히 힘겨운 사람들, 엄격한 수급 기준 탓에 아예 복지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업들이다.

예를 들어, 2013년부터 서울시는 소득이 최저생계비 미만이나 부양의무자 요건 때문에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되지 못한 시민들에게 생계지원금을 제공한다. 중증장애인들에게 활동보조시간을 지원하는 지자체들도 여럿 있다. 중앙정부 지원이 12시간으로 제한돼 추가 시간이 필요한 장애인을 위한 배려이다. 국민건강보험료가 월 1만~1만5000원 미만의 저소득가구에 보험료를 지원하기도 한다. 돈이 없어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생계형 체납자가 100만명에 이르는 현실을 반영한 사업이다.

거리노숙인 상담반을 운영하거나 근로가능한 노숙인의 사회 복귀를 돕는 자활사업, 가난한 아이들을 돌보는 지역아동센터 지원 등도 그러하다. 이러한 사업들이 지자체 복지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10%이다.

여기에 중앙정부의 중단 명령이 떨어졌다. 자신이 행하는 복지사업과 유사하거나 중복된다는 게 이유다. 지자체 자체복지 5891개 중 1496개, 총 1조원 규모의 사업이 대상이다. 정부는 ‘복지재정 효율화 중앙대책단’을 구성하고, 지침을 이행하지 않으면 지방교부금을 감액하는 시행령 개정안까지 입법예고했다. 황당한 일이다. 어려운 예산 여건에서도 자체복지를 실시하는 지자체에 상을 주기는커녕 벌을 내리겠다니. 아버지부터 이어온 가족의 꿈이 복지국가라면서 왜 이러는 걸까?

우선 대통령의 소신이 무척 강하다. ‘복지 분야에 유사·중복 지출이 많아 누수가 심하다’는 대통령의 선입견이다. 대통령은 대선공약에서 복지재정방안으로 지출 개혁, 지하경제 양성화, 복지행정 개혁을 내놓았다. 앞의 두 방안은 점점 공수표로 드러나고 이제 남은 카드가 복지구조조정이다. 그런데 사실상 실체가 없는 일이다. 이 작업을 맡은 국책연구기관조차 중앙정부 복지사업에서 중복은 한 건도 없고 유사사업으로 ‘추정’되는 일부 복지도 보완적으로 병행되어야 할 사업으로 진단했다. 그래서 지자체 자체복지로 표적을 집중하는데, 이 사업들은 거의가 중앙정부 제도의 틈새를 보완해주는 절실한 보충 복지들이다. 사업 하나하나를 따질수록 중앙정부 논리의 허구가 확인될 뿐이다.

그렇다면 강공 드라이브를 펴는 궁극적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 박근혜 정부 들어 중앙정부와 지자체 사이의 예산 갈등이 뜨겁다. 누리과정 전액을 강제로 떠안은 교육청, 기초연금 인상분만큼 대응예산 부담을 견디기 어려운 지자체로선 당연한 항의이다. 대선공약에서 지방재정 추가분을 모두 책임지겠다고 약속한 대통령으로선 입장이 궁색하다. 탈출구는? 유사·중복 담론 확산을 통한 지자체 책임론을 만들어내는 거다. 지자체가 복지 낭비를 방치하면서 예산을 요구한다고 말이다.

올해로 지방자치 20년이다. 그제 행정자치부가 20년 책자를 발간하며 ‘풀뿌리 민주주의 기틀이 마련됐다’고 평가했다. 그렇다. 어이없는 지침을 그냥 수행하는 예전의 지방자치가 아니다. 기초단체장들이 정부를 규탄하며 법적 대응까지 벌이고, 100여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전국복지수호공대위가 활동을 개시했으며 지역별 기구도 잇달아 발족하고 있다. 중앙정부를 향해 기초단체장들이 나서고 지역사회, 복지현장도 저항 채비를 갖추니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복지 정치가 지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지금까지 복지 논의를 중앙정치가 주도했다면 이제 지역에서 쟁점이 형성되고 지자체, 지역단체, 복지기관들이 꿈틀거린다. 복지가 구현되는 공간이 지역사회이고, 복지국가를 만들 주체도 지역 주민이라는 점에서 ‘복지 정치의 지역화’는 복지국가 건설에서 소중한 발전이다. 보편/선별 복지 논쟁이 복지에 대한 권리 인식을 낳았다면, 지역사회가 주도하는 복지 정치에서 아래로부터 풀뿌리 복지 주체가 커가기를 기대한다. 아마도 대통령은 이런 방식으로 아버지의 꿈에 기여하려는 모양이다.